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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의 눈

[편집장의 눈] 방사능보다 더 무서운 정부

안녕하십니까. 디지털뉴스 편집장 박래용입니다.
 
한나라당 지도부가 일본 원전 사고로 인한 우리 국민의 방사능 걱정을 두고 ‘불순세력’ ‘좌파 단체’ ‘국가전복 획책’ 등의 용어를 써가며 색깔 공세를 펼치고 있습니다. 김무성 원내대표는 8일 의원총회에서 “불안감을 조성하는 불순세력이 활동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심재철 정책위의장은 “이번 재보궐선거와 내년 총선, 대선에서 누가 피해를 보겠느냐”고 맞장구를 쳤습니다. 




김무성 원내대표가 8일 오전 국회 귀빈식당에서 열린 일본 원전사고 방사능 대책관련 당정협의에서
방사능 관련 조선일보 기사를 보고 있다. 연합뉴스


여당 지도부가 아침 회의에서 돌아가며 한마디씩 현안을 짚는 것은 사실 사전에 조율된 발언입니다. 여당내 야당이라 할 수 있는 비주류야 가끔 내키는 대로 불만을 쏟아 놓기도 하지만, 주류인 대표나 원내대표 등은 ‘오늘의 아젠다’를 내놓는 게 관행입니다. TV뉴스에서 최고위원 회의를 보노라면 이들이 메모를 손에 들고 줄줄 읽는 장면을 보신 적이 있을겁니다. 일부 인사는 가끔 아침 신문 같은 소품을 들고 흔들 때도 있습니다. 
 
개인적인 경험입니다만 2000년 집권 여당인 새천년민주당 출입기자 시절 당시 김옥두 사무총장은 기자들이 방으로 찾아가면 조용히 양복 안주머니에서 A4용지 1장 짜리 페이퍼를 꺼내 들었습니다.
그는 종이를 마주 앉은 사람이 볼 수 없도록 4분의 1 정도로 접어 들고 마치 컨닝 페이퍼를 훔쳐보듯이 “야당이 이렇게 하면 안됩니다. 그 이유는 첫째 ………, 둘째 ………”라며 읽더군요. 기자들 사이에선 그 컨닝 페이퍼가 청와대 정무수석실에서 정리해 내려 보낸 일종의 ‘핵심 요점 정리’란 것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대표나 원내총무, 일부 동교동 핵심 인사들을 만나고 온 다른 동료 기자들도 자구만 조금 틀릴 뿐, 비슷한 내용을 듣고 옵니다. 이를 다 종합해보면, ‘아하, 오늘 청와대와 여당은 언론에서 무엇이 이슈화되기를 바라고 있구나’라는 그림을 쉽게 그릴 수 있습니다.       
 

 
경기도의 한 정수장에서 지난 8일 직원들이 방사성물질을 막기 위해 비닐을 덮고 있다. 사진 www.sentv.co.kr
 

지금의 여권은 일본 원전 방사성 물질 누출과 관련한 정부의 축소·은폐·혼선·뒷북 대응에 대한 비판이 확산될 조짐을 보이자 이를 조기 차단할 논리와 타깃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찾아낸 게 지금부터 누구든지 방사능 불안을 얘기하면 “빨갱이” “국가전복세력”으로 낙인찍겠다는 것입니다. 한나라당에 따르면 ‘방사능 비’가 예고된 날 교장 자율로 휴교할 수 있도록 한 조치는 좌파 교육감의 농간이고, 정수장에 비닐 덮개를 씌운 환경부도 불순 단체의 선동에 놀아나 호들갑을 떤 셈이 됐습니다.    
 
경향신문 정치부에서 한나라당을 출입하고 있는 이용욱 기자는 여권이 난데없이 색깔론을 제기한 배경을 이렇게 분석했습니다. 

‘전·월세 대란, 물가고 등으로 무능 이미지가 씌워진 상황에서 방사능 대응까지 실패를 인정하기는 부담스러웠을 법 하다. 진보성향 교육감과 언론 등을 혼선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국가전복론까지 제기한 것은 민심 이반으로 고전 중인 4·27 재보선 등에서 보수층을 선동·결집하려는 계산도 엿보인다.’
   
누가 보더라도 그간 방사능에 대한 국민의 불안과 공포, 혼선을 증폭시킨 쪽은 정부였습니다.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줘야 할 교육과학기술부·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기상청 등 주무 부처들은 “편서풍 때문에 일본 방사성 물질이 한반도로 유입될 수 없다”고 호언장담했지만, 보름 만에 “동풍을 타고 올 수 있다”고 말을 바꿨습니다.
한반도에서 방사성 요오드가 검출됐다는 언론 보도에 교과부·기상청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부인했다가, 하루 만에 검출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우리 정부는 일본이 바다에 방사능 오염수를 대량 방류한 사실도 사전 통보받지 못했고, 외교 라인을 통해서도 파악하지 못한 무능을 보여주었습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이런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기보다 과학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시민과 단체를 ‘국가전복 세력’으로 몰아붙이는 황당한 태도입니다.
김무성 원내대표는 “오늘 일간지 보도를 봤지만 과거 광우병 사태를 일으킨 장본인들인 49개 시민단체로 구성된 ‘일본 대지진 핵사고 피해 지원 정책전환 위한 공동대응’이라는 단체가 휴교령을 내리라고 하고 좌파 교육감들이 휴교령을 내리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사회불안을 조성하고 국가를 전복시키려는 불순한 행동을 당당히 제압해야 한다”고 덧붙였습니다.
 
김 원내대표가 인용한 일간지는 조선일보입니다. 조선은 참여연대·민주언론시민연합·민주노총 등 49개 단체로 구성된 ‘일본 대지진·핵사고 피해지원과 핵발전정책 전환을 위한 공동행동’에 대해 “공동행동 49개 단체 중 28개는 3년 전 ‘광우병 국민대책회의’에 소속됐던 단체”라고 보도했습니다. 기사의 제목은 ‘좌파단체들, 방사능 비 공포 근거없이 부풀려’로 붙였습니다. 



2008년 ‘광우병 대책회의’에는 전국의 1800여개 시민단체가 참여했습니다. 대한민국의 웬만한 시민단체 중 대책회의에 이름을 올리지 않은 단체가 없을 것입니다. ‘광우병 대책회의’에 참여한 단체는 모두 좌파단체인가요. 그러니 그들이 한 말은 믿을 수 없다는건가요. 나라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 단체들은 입 닫고 가만히 있으라는건가요. 
이들 단체는 지금도 교육, 환경, 인권, 예산 등 사회 전 분야에서 정부 정책을 감시하고 비판하는 또 다른 정부, 즉 비정부(非政府·Non-Government)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한나라당은 이런 공공의 활동도 ‘사회 불안을 조성하고 국가를 전복시키려는 불순한 행동’으로 보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서울 연세대 앞 사거리에서 7일 학생들이 방사능 비 걱정에
우산을 쓰고 보행신호를 기다리고 있다. | 서성일 기자


 
한나라당과 보수언론은 국민의 방사능 공포가 2008년 촛불 때와 같이 걷잡을 수 없는 양상으로 번지지 않을까 우려하는 듯 합니다. 선거는 코앞에 닥쳤는데 민심은 흉흉하고, 위기론은 분출하고 있습니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옵니다. 하지만 당면한 상황이 아무리 절박했다 하더라도 말과 논조가 지나쳤습니다.   
엊그제 내린 비는 서울 등 전국 12개 측정소 모두에서 방사성 요오드와 세슘이 검출됐습니다. ICRP(국제방사선방호위원회)는 이 정도 방사성 물질이 검출되는 때엔 시민들에게 ‘노출을 통제하라’고 권고하고, 당국에는 식수·음식·공기 등 사람이 노출될 수 있는 모든 경로 관리를 철저히 할 것을 촉구하며, 이에 대비할 수 있는 정확한 정보를 알리도록 하고 있습니다.
 
더도 덜도 말고, 우리 정부가 딱 그렇게만 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맵고 쓰고를 맛보는 것처럼, 슬픔과 기쁨을 느끼는 것처럼, 괜시리 불안감이 드는 것에 무슨 좌우가 있겠습니까. 방사능도 무섭지만, 시민을 타박하고, 유언비어를 단속하겠다고 눈을 부라리고, 걱정하는 시민단체를 국가전복 세력이라고 몰아붙이는 정부는 더 무섭습니다.  



4월 9일자 경향신문 '김용민의 그림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