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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의 눈

[편집장의 눈] 리얼과 가식


버락 오마바 미국 대통령이 5월 5일 뉴욕 맨해튼의 9·11테러 현장인 그라운드 제로를 찾아 헌화한 뒤 묵념하고 있다.

그라운드 제로를 찾은 미국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침묵이 화제입니다. 빈 라덴을 사살한지 나흘 만인 5일 뉴욕 9·11테러 현장인 그라운드 제로를 찾은 오바마 대통령은 꽃 한 다발을 헌화한 뒤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묵념했습니다.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백파이프나 군악대 연주도 없었고, 근엄한 연설도 없었습니다. 일각에서는 미국의 단합을 촉구하는 명연설을 예상했지만, 오바마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침묵은 20여분간의 헌화식 내내 계속됐습니다. 수많은 시민들이 성조기를 흔들며 대통령을 환영하고 행사를 지켜봤습니다. 오바마를 연호하는 연도의 시민들과 손을 잡는 흔하디 흔한 장면조차 없었습니다.

미국도 내년에 대선이 있습니다. 오바마는 재선 도전을 선언했습니다. 불투명한 경기전망, 재정적자 확대, 리비아 사태 장기화, 아프가니스탄 파병 등으로 곤란한 처지에 빠져 있는 오바마입니다. 이런 대형 호재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유혹을 뿌리쳤습니다. 헌화식을 마친 뒤 희생자 유족과 소방대원·경찰관들과 만난 자리에서도 방송 카메라는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기자들은 대통령이 떠난 뒤 소방관이나 경찰관들로부터 대화 내용과 분위기를 전해들었다고 합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빈 라덴 사살을 자신의 재선을 위한 정치적 이벤트로 만든다는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자신을 한껏 낮췄다고 미 언론은 보도했습니다. 한 정치 평론가는 “그는 진정한 국민 통합을 원했던 것 같다”고 분석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이 백악관 상황실 구석에서 작전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오바마가 1일 새벽 백악관 상황실에서 외교·안보라인 참모들과 작전을 지켜보는 사진도 두고두고 회자될 것 같습니다. 오바마는 합동특수전사령부 부사령관(준장)에게 대통령 의자를 양보하고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습니다. 낮은 의자에 웅크리고 앉은 모습이 마치 수발드는 보좌관처럼 보였습니다. 만약 오바마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에게 이 사진을 보여주면 누가 대통령인지 골라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학자들은 “작전이 전개되는 동안 참모들의 의견을 귀담아듣고 협력체제를 이끌어내는 모습을 보여준다. 여기에는 ‘탑건’ 복장이 필요 없다”고 평가했습니다.

오바마는 크고 높은 의자에 앉은 것도 아니고, 중앙에 자리 잡은 것도 아니었지만, 강력한 리더십과 자신감을 보여줬습니다. CNN방송은 “한 시대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강력하고도 비범한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미국 국민은 대통령의 이런 낮추는 리더십에 감동을 먹고 있다고 합니다. 오바마 지지도는 지난달 46%보다 무려 11%포인트나 수직상승했습니다. 웅변보다 빛난 침묵과 대통령의 낮추는 리더십에 더 박수를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삼호 주얼리호 구조와 관련해 청와대 상황실에서 보고를 받고 있다. 청와대 제공

오바마를 보면서 우리 실정이 오버랩되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1월 ‘아덴만의 여명’으로 이름 붙여진 삼호 주얼리호 인질 구출작전 성공 직후 국방부보다 먼저 나섰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승전을 선조가 알리는 격입니다. 군사 비전문가인 대통령이 구출작전을 진두지휘했다는 믿기 힘든 청와대의 홍보성 설명도 뒤따랐습니다. 거북선의 해상 작전을 선조가 지휘했다는 것입니다. 작전 성공을 홍보하는 과정에서는 온갖 세부 작전내용, 장비, 연합군과의 협조, 동영상 등 군사기밀이 속속 공개됐습니다. 오래 전에 찍은 청해부대원 훈련 사진을 구출작전 성공후 특수전 요원들의 사진이라고 내놓은 것은 ‘아덴만 마케팅’의 절정이었습니다.

무장 병력이라고 하기도 민망한 소말리아 해적 제압을 자신의 치적으로 자랑하는 것은 국가 원수이자 군통수권자의 태도라고 하기에는 너무 가볍고 얄팍해 보입니다. 어느 홍보 전문가는 “대통령과 청와대 인물들이 국가를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을 회사처럼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국가를 회사처럼 간주해 성과 마케팅에 올인하고, 쌍방향 소통보다 일방적 밀어 붙이기 식으로 국정을 운영했던 결과는 민심 이반과 잇따른 선거 참패를 불러왔습니다. 지지율이 50%가 넘는다는 주장은 이제 아무도 믿지 않습니다. 오죽하면 떠나는 안상수 대표조차 “대통령은 국민과 소통이 부족하고, 민심을 읽지 못하고, 당의 말도 안듣는다”고 힐난했겠습니까.

국민은 잘 알고 있습니다. 어느 것이 리얼이고, 어느 것이 가식인지. 상징 조작의 정치는 반짝 재미를 볼지는 모르지만,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합니다. 국민을 하나로 묶지도 못합니다. 이 정부가 걸핏하면 내세우는 국격(國格)이란 것도 배점을 뜯어보면 지도자의 품격이 상당 몫을 차지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