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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의 눈

[편집장의 눈] 진실혁명

          지난 1월, 튀니지의 수도 튀니스 도심의 한 건물 벽면에 23년간 장기집권하다 국외로 탈출한
          지네 엘 아비디네  벤 알리 전 튀니지대통령의 포스터가 찢겨진 채 방치돼 있다. /경향신문 DB
 

 
“튀니지 하급관리들 사이에 뇌물수수가 만연하며 대통령 일가의 과도한 재산 축적으로 부패가 일상화돼 있다.”
 
2008년 6월 튀니지 미 대사관이 본국에 보고한 외교문서 내용입니다. 지난 연말 위키리크스를 통해 이 외교문서가 공개되면서 재스민 혁명이라 불리는 튀니지 반정부 시위의 도화선에 불이 붙었습니다. 미국의 외교 전문잡지 포린 폴리시는 이를 “첫번째 위키리크스 혁명”이라고 표현했더군요.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외교 전문에는 이집트 무바라크 정권의 비리와 부패상을 적나라하게 기록한 내용도 포함됐습니다. 이집트 시민들은 분노했고, ‘현대판 파라오’라는 30년 집권 무바라크 정권은 무너졌습니다.
 
 

             지난 2월 이집트 반정부 시위 당시,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 타흐리르 광장에서 열린 시위에 참가한 

                한 젊은이가 이집트 국기를 펼쳐 든 채  호스니 무바라크의 퇴진을 촉구하고 있다. /경향신문 DB


21세기에 만들어진 웹사이트 하나가 20세기 독재정권을 차례로 무너뜨리고 있는 것입니다. ‘진실’의 힘입니다. 위키리크스의 창시자 줄리언 어산지는 “권력자들의 수프에 침을 뱉는 게 좋다. 이 일은 정말 재미있다”고 했습니다. 


위키리크스는 2010년 4월에는 이라크에서 발생한 민간인 사망 사건이 찍힌 동영상을 공개, 세계의 보안관을 자처하는 미국의 얼굴에 침을 뱉었습니다. 헬기에 부착된 자동 카메라에 담긴 영상에는 미군 아파치 헬기가 지상의 민간인 12명을 향해 30밀리 총탄을 퍼붓는 장면이 담겨 있었습니다. 
 “저 새끼들 뒈진 것 좀 봐”
    “나이스”
미군 조종사들이 나눈 대화는 영상보다 더 충격적이었습니다. 위키리크스가 세상에 공개한 동영상은 미국이 이라크에서 벌이고 있는 전쟁의 성격과 방식을 그대로 보여줬습니다. 


위키리크스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시민운동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위키리크스의 등장은 권력의 뒷면을 보여주는 새로운 정치 주체의 출현을 의미합니다. 위키리크스는 정보의 독점적 소유를 문제 삼고 있습니다. 권력에 의해 진실이 은폐되고 나아가 거짓을 진실처럼 포장하는데 대한 새로운 형태의 권력투쟁인 셈입니다. 무엇이 비밀에 부쳐져야 하는가를 함께 결정하겠다는 새로운 정치 주체가 갑자기 출현하면서 이제까지 정보를 독점해온 정부와 권력은 몹시 당황한 것 같습니다. 
 
미국은 공식적으로 위키리크스를 국가의 안전을 위협하는 적으로 선언했습니다. 정부에서 일하는 모든 공무원들은 위키리크스 관련 인터넷 주소의 사용이 금지되었으며, 국회 도서관에서도 위키리크스 사이트 접속이 차단되었습니다. 표현의 자유에 있어서 미국은 이제 중국과 북한, 짐바브웨와 비슷한 수준으로 전락했습니다. 누가 상상이나 했습니까.  


  경향신문이 만든 공익제보 사이트,  경향리크스 (https://www.khleaks.com)의 초기 화면


계속 비밀에 부쳐질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대중에게 공개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그런 믿음으로, 경향신문이 국내 최초로 공익 제보사이트 ‘경향리크스’를 개설했습니다. 위키리크스의 한국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계기는 단순했습니다. 지난 연말 위키리크스의 외교전문 공개로 온 지구촌이 발칵 뒤집힌 때, 경향신문 디지털뉴스국에서는 “남 이야기만 할 게 아니라 우리도 이런 것 하나 만들 수 없을까”라는 얘기가 나왔습니다. 준비팀이 구성되고, 올 1월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제보자의 신상을 어떻게 완벽히 보호할 수 있느냐는 점이었습니다. 브라질·벨기에 등 해외에 서버를 만드는 방안이 나왔으며, 최종적으로는 위키리크스가 서버를 둔 스웨덴에 구축하기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준비 작업은 꼬박 두 달이 걸렸습니다. 3월 초에는 내부 테스트를 완료했습니다. 곧바로 사이트를 오픈하려 했으나 예기치 않은 일본 대지진이 발생하는 바람에 일정을 늦춰야 했습니다. 리비아 공습이 이어지는 바람에 또 며칠 유보했습니다. 결국 경향리크스는 지난 23일 본지 1면 사고를 통해 개설 소식을 알릴 수 있었습니다.

개설 이후 반응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뜨거웠습니다. 사이트를 오픈한지 채 1주일도 안된 지금, 20여건의 제보가 들어왔습니다.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독자 여러분께 약속드린 바와 같이 제보된 내용은 정밀한 검토와 확인 취재를 거쳐 하나씩 공개하도록 하겠습니다.  


모든 정보를 자유롭게 공유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떤 정보는 보호 받아야 하며, 어떤 정보는 비밀로 간직해야 할 것들도 있을 것입니다. 기본적인 전제는 그것이 공공의 이익을 위할 때만 그래야 한다는 것입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어느 누구도 권력을 ‘당신들 멋대로 하라’고 주지 않았습니다. 민간인 살상 정보를 은폐하라고도,  권력이 민간인을 사찰하고 그 기록을 은폐하라고도 쥐어준 것이 아닙니다. 권력이 어떤 활동을 ‘비밀에 부칠 권리’가 있다면, 시민에겐 ‘권력에 속지 않을 권리’가 있습니다. 남들에겐 법을 지키라고 하면서 자신들은 그 위에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우리는 이를 세상에 알릴 의무가 있습니다. 위키리크스의 활약은 이 세계에, 여전히 규칙 위에 존재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끄럽습니다만, 고급 정보가 언론사가 아닌 폭로 사이트로 가게 된 현실은 기존 언론사가 자초한 측면이 큽니다. 이제 사람들은 언론을 더 이상 ‘감시견(watch dog)’으로 생각지 않는 것 같습니다. 과거 일련의 사건을 되돌아보면 일부 언론사는 ‘어떤 내용이 폭로됐는가’보다 ‘이것을 어떻게 구했나’로 의제를 몰고 가는 일이 비일비재했던 게 사실입니다. 분명한 것은 앞으로는 귀한 정보와 기밀들이 점점 더 ‘그것을 세상에 공개할 수 있는 곳’으로 흘러가게 될 것이란 점입니다. 
 

‘진리와 허위가 맞붙어 논쟁을 하도록 하라’
 
새로 문을 연 경향리크스의 모토입니다.
이런 다짐에 스스로 충실하며, 독자 여러분들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분투하겠습니다.

 
디지털뉴스국 박래용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