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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의 눈

[편집장의 눈]한상률 흥망사

디지털뉴스 편집장 박래용입니다.

한상률 전 국세청장이 돌연 귀국했습니다. 미국으로 도피성 출국한 게 2009년 3월이었으니 근 2년 만이네요. 그는 왜 갑자기 돌아왔을까요.

범죄가 발생하면 경찰은 먼저 3가지를 살펴 봅니다. 첫째는 범죄로 인해 가장 이득을 보는 사람이 누구냐는 것이고, 둘째는 남녀간 치정 관계입니다. 세번째는 원한 관계죠. 세 가지 모두 해당되지 않으면 대체로 우발적 범행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경찰 수사원칙에 빗대면 한상률의 지금 귀국은 누구에게 가장 좋을까요. 한상률은 자신에게 가장 유리하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현 정권이 아직 힘이 남아 있을 때 자신의 비리를 엄호받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거죠.

한상률에 얽힌 의혹은 개인비리와 정치 비리로 나눠 볼 수 있습니다. 개인비리는 ‘그림 로비’(인사청탁을 위해 전임 전군표 국세청장에게 그림을 상납했다는 의혹)와 ‘골프 로비’(국세청장 유임을 위해 이상득 의원측에 골프 접대했다는 의혹), ‘수뢰 비리’(신성해운으로부터 세무조사 무마 청탁 명목으로 5000만원을 받았다는 의혹)가 있습니다. 정치 비리는 박연차 회장 표적 세무조사 과정 및 배경, 도곡동 땅 차명 소유 은폐 의혹 등입니다.    

드러난 의혹을 중심으로 그의 국세청장 재임사를 살펴볼까요.

한상률은 차장 시절 2007년 2월 당시 전군표 국세청장에게 고가의 그림 ‘학동마을’을 선물했습니다. 잘 봐달라는 일종의 상납이었겠죠. 결과적으로 그림 선물은 안해도 됐을뻔 했습니다. 참여정부 말기인 그 해 11월 그는 국세청장으로 승진하는 행운을 잡았습니다. 전군표 청장이 부산발 인사 비리로 돌연 낙마했기 때문입니다. 예정대로라면 행시 20회 전군표 청장과 21회 한상률 차장은 참여정부 임기와 같이 옷을 벗었을 것이라는게 국세청내 정설이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2007년 11월 30일 청와대에서 한상률(오른쪽) 국세청장등 새로 임명된 공직자들에게 임명장을 주고있다.


 
졸지에 청장에 오른 그는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자 충성 카드를 내보입니다. 그는 충남 태안 출신입니다. 2008년 2월 첫번째 꺼내 든 김앤장 세무조사는 이회창 대선자금 관련 정보를 새 정권에 제공하기 위한 표적 조사로 알려져 있습니다.

참여정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보이기 위한 노력은 눈물겹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친구가 대표로 있는 제주 골프장과 노 전 대통령이 척추 수술을 받은 ‘우리들 병원’이 세무조사를 받았습니다. 노 전 대통령이 즐겨 찾던 종로구 효자동 삼계탕집 ‘토속촌’에 대해서도 세무조사를 벌였습니다. 민주당의 한 친노 의원은 “삼계탕집에 세무조사 들어가 수십억원의 추징금을 물린 일은 국세청 역사상 전무후무할 것”이라고 하더군요.

KBS 정연주 사장이 유임 버티기를 하자 KBS 외주제작사를 세무조사 했고, 2008년 5월 광우병 파동 때는 촛불 민심의 중심이었던 인터넷 포털 다음에 대해서도 세무조사의 칼을 빼들었습니다. 거의 난자 수준입니다. 영화 ‘친구’에서 장동건은 이런때 “고마해라…많이 묵었다 아이가”라고 했던가요. 하지만 한상률의 칼질은 그침이 없었습니다.

“고마해라…많이 묵었다 아이가”

절정은 2008년 8월 태광실업 특별 세무조사입니다. 박연차 회장 세무조사는 촛불 반전책을 찾는 정권에 한 건 크게 진상한 것이라는 얘기도 있고, 해운사 수뢰 의혹으로 자신이 경질 위기에 몰리자 자구책으로 비장의 카드를 꺼낸 것이라는 분석도 있습니다. 여하튼 그가 박연차 세무조사를 진두지휘하고, 전·현 정권 인사 수십명이 엮인 세무조사 결과를 직접 이명박 대통령에게 독대 보고한 사실은 널리 알려진 얘기입니다.           

토사구팽이라고 할까요. 이런 충성에도 불구하고 국세청장 교체설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2008년 연말 국정원장(김성호)·검찰총장(임채진)·경찰청장(어청수) 등 4대 권력기관장이 모두 참여정부 인사인 점을 들어 MB 측근들 사이 “우린 사람이 없느냐”는 불만이 표출되기 시작했습니다. 교체 대상에 국세청장도 올라 있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결과적으로 2009년 1월 국정원장과 경찰청장이 바뀌었지만 한상률은 건재했습니다.               

한상률은 가까스로 큰 비를 피했다고 안도했겠지만, 권력 내부의 암투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 무렵 한 시사주간지가 한상률 국세청장이 경주에 내려가 이상득 의원과 친분이 있는 포항 지역 인사들과 골프를 하며 유임 로비를 벌였다고 단독 보도했습니다. 그 며칠 뒤 한 석간신문은 그림 로비 의혹이란 2탄을 터뜨렸습니다. 두 기사의 ‘딥 스로트’가 누구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여권 내 반(反)한상률 기류가 퍼져 있었던 것만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여권의 한 실세는 사석에서 “인수위 시절, 한 청장이 보고를 끝내고 ‘저 좀 안아주세요’라면서 난데없이 포옹을 하기에 깜짝 놀랐다”며 그의 처세술에 혀를 끌끌 차더군요.      


마침내 한상률은 1월 16일 청장직을 사퇴하고, 두달 뒤인 3월 15일 검찰 수사를 피해 미국으로 출국했습니다.


한상률 전 국세청장이 기자 간담회를 갖고 자신을 둘러싼 각종 의혹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런 그가 돌아왔으니 배경을 놓고 온갖 궁금증이 나오는건 당연합니다. 언론에선 여권이나 검찰과의 사전 조율설이 나오고 있습니다. 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리와 똑같습니다. 그가 누구인데, 아무런 안전장치없이 ‘아, 이제 집에나 가야겠다’고 불쑥 비행기를 탔겠습니까. 지금으로선 누구와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지금을 귀국의 최적기라고 판단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한상률이 현 정권과 관련된 의혹을 폭로할 가능성은 낮아 보입니다. 현 정권 의혹을 폭로할 요량이었다면, 총선과 대선이 있는 내년이나, 차기 정권 때 들어오는게 훨씬 폭발력이 있었을테니까요.

그가 연루된 개인 비리 수사는 최소화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를테면 ‘그림 로비’ ‘골프 로비’는 직무 관련성이나 대가성이 없다고 정리될 수 있습니다. 비판 여론을 감안했을때 구속이 불가피할 경우 ‘세무조사 무마 비리’로 구속되고, 현 정부 임기내 풀려나는 시나리오가 예측 가능합니다. 일단 판결이 확정되면 같은 사건에 관해 다시 공소제기가 불가능한 일사부재리의 원칙은 앞으로 든든한 방패막이가 될 것입니다. 물론 ‘판도라의 상자’에 대해서는 함구한다는 게 전제가 되어야겠죠.

27일 오전 경기 고양시 자택 앞에서 경향신문 기자와 만난 한 전 청장의 부인은 “미국에서 집필한 책이 곧 출간될 예정이라 귀국한 것”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책 내용은 <한국의 사회 갈등과 해결 방안>이라고 하네요. 그에 대한 수사가 갈등의 시작이 될지, 종결이 될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