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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의 눈

[편집장의 눈]삼각파도 맞는 대한민국

 디지털뉴스 편집장 박래용입니다.

 뱃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삼각파도(pyramidal wave)라고 합니다. 국지적으로 발생한 돌풍 때문에 서로 진행 방향이 다른 두 물결이 부딪쳐 생긴 높은 파도입니다.

                                                                              삼각파도(출처: 구글이미지)

다른 파도와 달리 꼭대기가 피라미드처럼 뾰족해진다고 하네요. 한쪽 파도를 타면 다른 파도가 배의 측면을 때리기 때문에 뱃머리를 어느 쪽으로 잡을지 위험천만한 상황이 벌어진다고 합니다. 우울한 소식 뿐입니다. 마치 거대한 삼각파도가 온 나라를 덮치는 것 같습니다.




 첫번째 파도는 이른바 ‘대란(大亂)’이란 꼬리가 붙는 현안들입니다. 구제역 대란, 물가 대란, 전세 대란…. 개개 사안들의 위중한 실태는 새삼 들춰볼 필요도 없습니다. 

  구제역으로 살처분된 소와 돼지는 현재까지 320여만두입니다. 우리나라 전체 1500여만 마리 중 20%가 넘습니다. 전국 4000여곳 가축 매몰지에서 비롯되는 환경피해는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보상금만 8000억원에 육박하고, 앞으로 예상되는 환경·경제적 피해는 3조원이 넘을 것이란 전망입니다.

동물자유연대 회원들이 지난 1월 19일 서울 명동에서 구제역, 조류인플루엔자로 인해 생매장된 210만 마리 동물의 고통을 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거리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경향신문 DB



 물가는 매주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습니다. 고물가 고통을 가장 먼저 겪는 층은 서민들입니다. 1월에만 주요 생필품 80개 중 53개 품목이 올랐지만, 진정될 기미도 보이지 않습니다. 기업에 가격 하락을 윽박지르고 있지만 효과는 언 발에 오줌누기일 것입니다. 더 심각한 것은 전세 대란입니다. 전셋값은 96주 연속 오르며 서민들은 전세갈 집도, 돈도 없이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고 있습니다. 전세 난민입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자칭 경제 대통령을 표방했습니다. 그의 ‘747 공약’(7% 경제성장, 국민소득 4만달러, 세계경제 7위 대국)이 아직 귀에 선합니다. 747은 고사하고, 그 사이 가계부채만 급증해 국민 재산은 6분의 1으로 줄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금융위기를 극복한 대한민국이 언제 다시 석기시대로 돌아갈지 위태롭기만 합니다.

 두번째 파도는 지역 분열입니다. 과학벨트와 신공항은 온 나라를 싸움판으로 만들어 놓은 채 지역을 갈갈이 찢어놓고 있습니다. 이 대통령은 대선 공약으로 내건 주요 국책사업을 말 바꾸기, 눈치 보기, 결정 미루기, 책임 떠넘기기 등으로 지역간 첨예한 대립을 자초하고 있습니다. 굳이 나서지 않아도 될 일까지 시시콜콜 얼굴을 보여 온 대통령이 정작 중요한 국가적 현안에서는 뒤로 쏙 빠져버린 셈입니다. 대통령 긴급담화라며 해적 소탕 승전보를 전했던 기민함은 어디 갔을까요. UAE 원전 수주를 진두지휘했다는 뻥튀기 홍보는 어디 갔을까요. 혹여라도 ‘공(功)은 내가, 과(過)는 네가’라는게 정권 홍보의 원칙이라면 무책임을 넘어 비겁하기 짝이 없는 태도입니다.

 

이재오 특임장관(왼쪽)이 지난 2월 6일 서울 여의도의 한 음식점에서 열린 한나라당 내 친이계 의원 모임인 ‘함께 내일로’의 개헌 간담회에 참석해 의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경향신문 DB


이 와중에 대통령과 친이계의 관심은 온통 개헌에 쏠려 있습니다.
한나라당 친이계 주류가 주도한 개헌 의총에서 한 의원은 “구제역 대책에서 시스템의 실패라는 것을 많이 느꼈다. 구제역 사태를 겪으면서 개헌의 필요성을 더욱 느꼈다”고 했더군요. 구제역과 개헌이 무슨 상관일까요. 누가 보더라도 개헌은 당면한 국정 현안의 우선 순위에서 한참 밀려나 있습니다. 임기 4년차 정권에서 개헌을 위한 추진 동력이 붙을리도 없고요. 한데도 MB의 대리인인 이재오 장관은 개헌 군불을 계속 때고 있습니다. 차기 후보 견제나 권력 분점을 통한 정권 연장, 레임덕 최소화를 위한 도구로 활용하자는 정치공학적 ‘꼼수’라고밖에 볼 수가 없습니다.
 모쪼록 당면한 국정 주요 현안에 정치적·정책적 역량을 총집중해 급한 불부터 끄고, 한가한 꽃노래는 그 다음에 불러도 늦지 않을거란 생각입니다.  

무바라크의 퇴진을 외치며 100만 행진에 참가하기 위해 수십만 인파가 집결한 이집트 타흐리르 광장.


 나라 밖에선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이 민주화 시위에 무릎을 꿇고 퇴진했습니다. 이집트를 30년간 지배한 독재자가 18일간의 민주화 시위에 밀려 내놓은 대통령 하야 성명은 불과 30초 분량이더군요. 30년 영화(榮華)를 압축하는데 1분도 안걸린다니 권력무상이 실감납니다. 튀니지에서 ‘재스민 혁명’이 성공한 뒤 한 달 만입니다. 전문가들은 리비아와 요르단, 예멘에서도 비슷한 양상의 시민혁명이 일어날 수 있을 것으로 관측하고 있습니다. 이 국가들은 소수 지배층이 석유 이익을 독과점하고 다수 국민은 권력층의 부정부패 속에 빈곤과 실업에 시달리는 공통점을 안고 있습니다.


 인사 때마다 거짓말에, 스폰서에, 쪽방촌 투기에, 위장전입에, 탈세에, 부동산 투기를 한 후보들을 지켜봐왔습니다. 엊그제는 음주 뺑소니로 사망사고를 낸 인사(조석준 기상청장)까지 기용했더군요. 청와대는 이런 전력을 다 알고도 중용했다고 하니, 그 배짱이 놀랍습니다.    

 소·돼지의 5분의 1을 생매장시킨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는데도 기획재정부 장관은 “경찰이 백날 도둑을 지키면 뭐하나. 집 주인이 도둑잡을 마음이 없는데…”라며 책임을 농민에게 떠넘겼습니다. 주무 부처인 농림수산부 장관은 과거 정부의 구제역 매뉴얼을 탓했습니다. 집권 4년차에 들어서도 전 정부로 책임을 돌린다면, 현 정부는 언제쯤 무엇을 책임질라나요.  
 

 무바라크와 수십년간 우호적 관계를 유지해온 친정부 언론들이 사임하자마자 하룻밤 사이에 일제히 논조를 바꿨다는 외신 보도가 눈에 띕니다. 그동안 민주화 시위를 ‘소수 불평꾼들의 소요’로 깎아내리던 친정부 언론 매체의 1면 머리기사 제목은 ‘민중이 정권을 몰아냈다’로 달라졌다는군요.

 그러므로 방송에, 신문에, 종편까지 언론이 친여 보수의 우군(友軍) 일색이라고 방심하는 것은 금물입니다. 이 대통령은 주말 청와대 직원들과 북악산 등산을 하면서 “보람도 느끼고 자신감을 갖고 국정을 함께 하길 바란다”고 했습니다. 3년 전 저녁 촛불시위를 봤다는 그 산입니다. ‘아침이슬’ 노래를 듣고 눈물을 흘렸다는 그 산 등성이입니다. 그리고 “국민께 송구스럽게 생각한다”고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동안 대통령은 어디서 보람을 찾고, 무엇에서 자신감을 얻었는지 궁금합니다. 국민들도 그 보람과 그 자신감을 나눠 가질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국민이 바보 같지만, 한번도 바보였던 적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