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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사람들

'장도리'의 박순찬 화백을 만나다

예고 했듯이, 경향신문 편집국 기자들을 만나 파헤쳐보는 시간이 돌아왔습니다. ~~!! 
 



이번에는 SNS 사용자들이 가장 많이 리트윗하고 '좋아요'를 눌러주시는 촌철살인의 4컷만화 <장도리>의 작가 박순찬 화백입니다.


사내에서는 모두 박순찬 화백으로 부릅니다만, 공식 직함은 편집국 디자인팀 소속 박순찬 차장이십니다. 


화백이라 하면 대개 머리가 반백인, 연세가 드신 외모를 상상하시는데요.

화백은 화가를 높여 부르는 말이므로,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 아직 반백이 되려면 한참 남은, 혈기왕성한 청장년(이라 쓰고 중년이라 읽습니다. 조큼 후환이 두렵군요. ㅎㅎ)입니다.


박화백은 20대 중반인 1995년 경향신문에 입사했습니다. 20대 시절부터 '화백(畵伯)'소리를 들으신거죠. ('화동(畵童)' 소리는 못들어보셨다는군요. ㅎㅎ)
해서 올해로  17년째 오로지 <장도리>만 그리고 계십니다. 
그럼 장도리 첫회는 언제 시작됐느냐. 검색 끝에 찾아냈습니다.
<장도리>는 1995년 2월 5일 처음 연재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에는 4컷 만화가 늘 사회면에 실렸지요.



                                                  <장도리>의 탄생. 장도리 첫 회 입니다.


그날 신문 1면에 사고도 실렸네요. 당시 파릇했던 박순찬 화백의 사진을 보시죠~
(박화백, 과연 화동이라 불릴만 했네요. 지금과 사뭇 다른 모습...)



사고를 보자면..


"평범한 봉급생활자 '장도리'를 주인공으로하는 새 연재만화는 그날 그날 우리 사회의 모습을 네 컷의 그림과 짤막한 대화속에 압축시켜 독자에게 전달해드릴 것입니다. 장도리는 못을 빼거나 박을 때 쓰는 연장입니다. 경향신문의 새 시사만화 주인공 '장도리'는 우리 사회의 잘못된 구석구석을 찾아내 정의가 승리하는 사회를 만들어나가는데 앞장설 것입니다. '장도리'를 집필하는 박순찬 화백은 신세대 감각이 뛰어난 신인으로

세필화의 장점을 최대한 살리면서 동시에 시사만화의 생명인 촌철살인의 대사를 이끌어내는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



그럼 <장도리> 비교에 들어가보죠.   


왼쪽이 <장도리> 첫회..  제목 옆 사각미남 '장도리'의 얼굴을 눈여겨 봐주세요.
 오른쪽은 2011년 8월 5일의 '장도리'입니다.

16여년이 흘러 과거의 사각미남은 온데간데 없고, 중년의 '장도리' 로 변신했네요.




현재는 연재되는 지면도 바뀌어서 오피니언면에 가로로 실립니다.


그렇다면 많은 독자들이 궁금해하는 <장도리>의 아이디어는 도대체 어디서 나오느냐. 
 

박화백은 온갖 황당, 재미, 기괴한 글들을 알고 계시고, 퍼뜨리는 일명 정보 스프레더입니다.
약간 짓궃기도 하신데, 본인은 아니라고 무심하게 말씀합니다만..

에피소드 하나.
모 기자가 일전에 박화백과 메신저를 텄습니다. 
점심 시간후 본격적으로 마감을 하기 위해 두 눈 부릅뜨고 모니터를 노려볼라치면, 계속 깜박깜박 메세지가 날아오더랍니다.
대부분 링크인데, 눌러보면 각종 인터넷 유머, 화제의 글인데, 받아보는 재미가 처음엔 있었지만 그후에는 늘 이들 링크에 대해 반응을 메신저로 해야한다는 부담감에 시달리기 시작한 것이죠. 
그러다가 드디어 결전의 날이 왔습니다.
여느때와 같이 메신저를 타고 날아온  URL.
눌렀더니 플래쉬파일로 만들어진, 귀신이 움직이는 동영상이었던 겁니다.
모니터를 보고 심장이 벌렁거리는 증세를 경험한 모 기자.. 
미안하긴 했지만 박화백을 메신저에서 차단했습니다.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차단했다고 고백했지만, 박화백은 이미 마음 상하셨다는군요.

한데  사내에 같은 경험을 하시고, 똑같이 차단이라는 결정을 내린 분이 한 두분이 아니란 거죠.  ㅎㅎ

 
자. 각설하고..
이제 본격적인 취중 인터뷰로 들어가봅니다. 
이날 인터뷰는 
7월 중순 홍대앞 일대에서 진행됐습니다.
인터뷰 제안에, 박화백은 특유의 쿨한 어조로 "인터뷰 같은 건 안하니, 맥주나 한 잔 하지"라고 제안했고, 이에 박화백을 평소 존경(?)하던 후배기자들 몇몇이 동석했습니다. 대화가 평어체인 점을 너그러이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언제부터 화백이라 불리셨나요?

"입사할 때 부터 화백이었지. (옆에서 거드는 선배. 얘는 20대 부터 화백이라고 불렸어.." )
 그게 만화, 만평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어서 일찍부터 화백이라는 호칭을 붙이곤 했는데, 굳어진 거지."
 



박 화백은 아직도 017을 쓰는 몇 안되는 분입니다. 심지어 '010 통합 반대운영본부' 회원이기도 하죠.


-왜 아직도 017을 고수하시죠?
"획일적이잖아. 사회에 다양성이 있어야지." 
(그래서 아직 스마트폰도 거부하시고 계십니다.
공 기계를 받아 와이파이가 되는 곳에서 전화를 제외한 다른 기능만 쓰고 계시다는군요. ) 


#장도리와 살사 댄스

박 화백의 특기이자 취미 중 하나는 바로 살사 댄스랍니다. 그림이 그려지시나요??
사내 숱한 후배들은 이분의 유혹에 끌려, 홍대앞 살사바에 가서 못볼 꼴을 당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를테면 이런거죠. 춤도 출줄 모르는데 구경갔다가, 여자 사람인 후배에게 한 곡 추자고 제안이 와서 외면하다, 춤을 청하신 남자분은 그 텀에 춤도 못추시고..
그래서 살사 댄스도 함부로 구경갈게 아니라 좀 배운 다음에 가야한다는 조언 아닌 조언이 있었습니다.


-언제부터, 왜 살사를 배우기 시작했나요?
"2005년에  <만화 박정희>를 펴내고 나서, 어느날 출판사 사장님과 술을 마시는데  권유로 배우게 됐지"

(이어지는 설명.. 홍대앞에서 박화백은 꽤 유명하시답니다. 살사 선생님으로 활동중, 이라고 자랑도 조큼 하셨습니다. 살사가 궁금하신 분은,, 모 살사 클럽에 금요일 오후에 가보세요~ )

-살사를 배우고 나서 달라진 점은??

"이제 귀로 음악을 듣는게 아니라, 손가락 관절 마디마디로 음악을 듣지.. 춤은 그냥 생활인거야.
 태초에 최초의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바로 춤이었다고. 문자도 없고 언어도 없는데 그때 사람들이 어떻게 소통했겠어? 춤이라고, 바로 몸짓이라고."


-살사를 배우고 나서 <장도리>에도 변화가 생겼나요?

"물론이지. 리듬이 생겼달까? 강약중강약."
(독자 여러분도 <장도리>의 리듬을  감지하고 계셨나요?? )


#장도리와 나

 -<장도리> 한편을 그리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

(밝히지 말아달라 주문..했으나 과감히 공개합니다)

" 짧게는 수분에서 길게는 2시간쯤?"

- 시사만화이다보니 마감후 저녁-밤 사이에 사건이 크게 확대되거나 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을텐데요.. 
  마감하고 다시 그리는 일도 있었죠? 

"그렇지.."  
(짧은 답변, 할 말만 하시는 과묵한 타입이시죠.)


- 대학에서 천문학과를 졸업하셨는데요, 대학에서 만화동아리에서 활동하셨다고요. 
  만화가로서 욕심은 뭔가요? 

" '에반게리온' 같은 만화가 요즘에는 안 팔리는데 그런게 잘 팔리는 세상을 만들려고, 그래서 시사만화를 그리고 있어." 



*후배기자들에게 이런 조언도 남기며, 살사판으로 영입을 계속 시도하셨습니다. ㅎㅎ 

"기자들일 수록 춤을 배워야해. 열려있는 자세로 모든 걸 대해야지..
그래야 기사도 신선해지고 유연해지고.."




사실 이날 인터뷰는, 인터뷰를 격렬히 반대하셔서  술자리를 빙자하여 이뤄진 대화를 재구성한 것인데요.
그날 음주인터뷰는 길게 이어져, 박화백의 살사 댄스 한 판도 결국 보고 말았습니다요~ 
더 많은 대화가 이뤄졌으나, 기억을 되살리지 못해서..(이래서 알콜은 좋지 않아요... ^_^;;;) 여기까지 밖에 쓰지 못했습니다. 양해 바라며, 박화백의 반론 요청시 반영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또 궁금한 점이 있다면 댓글 달아주세요~ 
다시 물어 덧붙이도록 하겠습니다. 


취중인터뷰 다음날, 날아온 메세지. 
"어제 잘 들어갔는가?"
이에, 어제 취중 잡담을 정리하여 블로그에 싣겠다고 답장을 보내자 날아온 답장
"인터뷰는 다시 날 잡아 제대로 하지."

박화백, 이런 분이십니다.. ㅎㅎ   




 

다음에는 경향신문의 사설과 칼럼의 산실, 논설실을 탐방할 예정입니다. 

블로그 인터뷰를 통해 만나고 싶은 경향신문 기자들의 이름을 댓글로 남겨주세요. 
추후 반영하여 파헤쳐보도록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