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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사람들

리비아, 총성 울릴 때 마다 두려웠다

양호근 진희정 임종헌 기자

시민혁명 현장 누빈 경향신문 이지선 기자  

 

“어떻게 여자가 그 위험한 전쟁터에 갔다 왔냐고 물으시는 분들이 많은데, 기자가 현장에 가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거잖아요? 단지 ‘여’기자라 더 부각되는 것 같아요. 가족들도 걱정을 많이 했지만 막상 현지에서 위험에 처한 적은 없어서 ‘종군기자’란 말이 쑥스럽네요.” 
    

▲ 경향신문 이지선 기자. ⓒ 진희정


아직 내전이 끝나지 않은 리비아 현지에서 시민혁명의 현장을 생생하게 전한 취재기로 큰 반향을 일으킨 <경향신문> 이지선 기자(31·국제부)를 지난 13일 서울 정동 사옥에서 만났다. 지난 6일 귀국한 뒤 이튿날 곧바로 출근했고, 추석 연휴도 다 쉬지 못한 채 야근하러 나왔다는 그는 종군기자라는 단어에서 연상되는 ‘물불 가리지 않는 용감함’과는 거리가 있는, 밝고 소탈한 모습이었다.

이 기자는 지난달 24일 출국, 튀니지를 거쳐 28일 리비아의 수도 트리폴리에 도착한 뒤 닷새간 현지에 머물며 시민들이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는 모습을 <경향신문>에 전송했다. 긴장 속에 취재를 마치고 9월 1일 리비아 국경을 넘어 튀니지에 도착했을 때, 그는 “살아서 돌아왔다”며 혼자 환호했다고 한다.

칫솔도 빠뜨린 채 급하게 떠난 출장

“사실 제가 리비아에 간 것은 당시 갈 사람이 저밖에 없었기 때문이에요. 국제부의 다른 기자들은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태 후속 취재 중이었거든요. 물론 제가 영어를 해서 리비아에서는 영어가 통할 것이라는 생각도 했어요. 하지만 현실은 달랐죠. 아랍어가 필요했고, 현장에서 통역 구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죠.”

급하게 추진된 취재였다. 부모님께 제대로 설명도 못하고 리비아로 향했다. 칫솔, 치약을 챙기는 것도 깜빡할 정도였다. 신문사 차원에서도 북아프리카 현장 특파원은 처음이라 시행착오가 많았다. 회사 측이 갓 귀국한 이 기자에게 처음으로 주문한 것이 ‘이번 경험을 토대로 분쟁지역 취재 매뉴얼을 만들라’는 것이었다.

▲ 긴장감 속에 취재하던 상황을 회고하는 이지선 기자. ⓒ 진희정


리비아는 무아마르 카다피 원수에 맞선 시민군이 사실상 승리한 상태였지만 정국은 여전히 불안했다. 카다피가 아직 체포되지 않았고, 정부군이 언제 어떻게 반격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어서 취재진의 안전이 보장될 수 없었다. 이 기자는 현지에서 연합뉴스, 동아일보 기자와 팀을 꾸려 함께 취재했다. 그러나 트리폴리 현지 사람들은 42년 독재를 끝장냈다는 기쁨에 거리 곳곳에서 환호성을 올리고 있었다. 하늘로 총구를 향하고 방아쇠를 당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제가 트리폴리에 들어갔을 때는 이미 호텔 마다 외신기자들로 차고 넘쳤어요. 간신히 짐을 풀고 나왔을 때 거리는 온통 축제 분위기였죠. 대기도회에 참가한 사람이 2만 여명이나 됐는데, 반군 깃발을 들고 해방을 만끽하는 모습이 감동적이었어요. 우리나라의 4.19혁명이나 5.18민주항쟁도 이랬을까 하는 생각에 소름이 돋기도 했죠. 하지만 오발사고 가능성에 대해서 늘 불안했어요. 총성이 울릴 때마다 움찔움찔했죠. 그런데 옆에서 아이들은 웃으며 놀고 있더라고요. 총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아이들의 모습에 가슴이 짠했어요.”

▲ 이지선 기자는 리비아에서 머무는 닷새 동안 9신의 기사를 경향신문에 실었다.

    
그는 고민했다. 현장에서 보고 느낀 것을 어떻게 독자들에게 알려야 할까. 이미 많은 외신기자들이 현장에서 취재하고 있었고, 에이피(AP)통신에서 파견한 기자만 해도 11명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속보 경쟁은 의미가 없어 보였다. 그래서 회사와 상의한 끝에 사실을 건조하게 전달하는 스트레이트 대신 이야기체, 즉 내러티브 스타일의 현장취재기를 쓰기로 했다. 선택은 적중했다. 낯선 땅, 격변의 현장에서 마주친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과 관찰자인 자신의 느낌을 솔직담백하게 기록한 취재기는 뜨거운 관심과 화제를 모았다.

'어묵 들어간 김칫국을 먹었다'고 써라?

“독자들이 궁금해 하는 것은 무엇보다 기자가 현장에서 직접 본 것일 거라고 생각했죠. 저는 처음에 거룩하게 기사를 쓰고 제목을 뽑을까 생각했는데, 편집국장이 ‘어묵 들어간 김칫국을 먹었다’처럼 현장에서 무엇을 먹고, 입고, 어디로 갔는지 이야기하라고 했어요. 발상의 전환을 하라는 말이죠. 그렇게 생각을 바꾸고 기법을 달리 하니까 독자들이 재미있게 봐 주신 것 같아요.”

그는 평소 국제부에서 일하면서 전쟁기사를 서방 매체에 의존하는 게 답답했다고 한다. 기사에 어떤 의도가 담겨 있는지부터 의심해야 했기 때문이다. 외신에서 ‘땡큐! 사르코지’라는 제목의 기사를 봤을 때, 과연 리비아 국민들이 프랑스의 개입을 기뻐했을까 의심했다. 그래서 리비아 현장에서 자신이 직접 보고 인터뷰해서 기사를 쓸 기회를 가진 것이 특히 소중하게 여겨졌다고 한다.

▲ '종군기자'에 대한 고정관념과 달리 밝고 소탈한 인상의 이지선 기자. ⓒ 진희정


연세대 신문방송학과를 나온 이 기자는 졸업 무렵 여러 언론사에 원서를 냈지만 연이어 낙방한 경험이 있다. 글 솜씨가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하고 집중적으로 글쓰기에 매달렸다. 논조가 다른 여러 언론사의 사설을 무조건 베껴 써보는 것부터, 고전을 읽고 인용할 거리를 찾아낸 뒤 첫 문장을 인상적으로 쓰는 데 활용할 논술 노트를 만드는 일까지, 집요하게 노력했다고 한다.

그 결과 2003년 9월 <경향신문>에 입사할 수 있었다. 그는 언론사로서의 영향력이나 급여 등 처우 면에서 경향신문이 최고는 아니지만 기자에게 더 많은 기회와 가능성을 열어주는 회사이기 때문에 자부심을 갖는다고 말했다.

“경향신문은 뭐랄까, 동아리 같다고나 할까요? 하하하. 그만큼 편하고 도전의 기회가 많죠. 사주(社主)가 있어서 어떤 목적을 향해 가야하는 게 아니라, 구성원들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해 주는 언론사예요. 기자가 자기 힘으로 뭔가 바꿀 수 있다는 게 큰 매력이라고 생각해요.”    

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기자들에게 되도록 많은 기회를 주고자 하는 회사 분위기는 호기심 많고 도전정신이 강한 그에게 우호적인 환경이 돼 주었다. 이 기자는 지난 4월 원전사고 25주기를 맞는 우크라이나 체르노빌에 출장을 갔다. 러시아어도, 우크라이나어도 몰랐지만 통역을 구하고 비정부기구(NGO)의 도움을 받아 현장을 알차게 취재했다.

“저는 겁도 많지만, 호기심도 많아요. 궁금한 게 없으면 기사를 쓸 수 없다고 생각해요. 기자는 늘 ‘왜’라는 질문을 놓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호기심은 기자가 갖춰야 할 가장 기본적인 요건이죠. 안 궁금하면 상상력이 없어지잖아요. 상상력의 시초가 호기심이에요.”

그의 호기심은 책을 내는 동력이 되기도 했다. 지난 5월 <디지털 네이티브 스토리>라는 책을 영국에서 석사과정을 함께 공부한 김지수씨와 함께 공동 출간했다. 디지털 기술과 더불어 자라온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에 관한 이야기다. 이 기자는 영국 카디프대학에서 국제언론학 석사과정을 공부하면서 영국 신문시장의 발전상에 관심을 가졌고 독립 언론의 생존방안을 주제로 논문을 썼다.

"기자라는 자부심 보다 독자에 대한 두려움 더 커"

평소 해외 미디어 동향에 관심을 가졌던 그는 <경향신문>이 ‘한국판 위키리크스’라고 할 수 있는 ‘경향리크스’를 출범시키는 데도 일조했다. 아랍언론 <알자지라>가 팔레스타인 페이퍼를 만들고, <뉴욕타임스>가 자체적인 위키리크스를 만든다는 사실을 회사에 보고하자 <경향신문>도 경향리크스 추진에 박차를 가했다.

“해외 언론 동향을 파악해서 전달한 것뿐인데, 회사에서 잘 판단해 키운 것이죠.”

그의 도전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9월 중순부터는 8주간 중국어를 배울 예정이다. 한국언론진흥재단에서 지원하는 중국어 연수에 참여하게 됐다. 체르노빌과 리비아 현장을 취재하면서 다양한 외국어를 구사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더욱 강하게 갖게 됐기 때문이라고 한다.
    

▲ 언론이 얼마나 힘이 센지 알기 때문에 더욱 독자를 배려하고 신중하게 기사를 쓰려고 노력한다는 이지선 기자. ⓒ 진희정


이 기자는 현재 국제부에서 활약 중이지만 사회부 기자 시절도 그립고, 경제 공부를 열심히 해서 경제부 기자로도 뛰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러면서도 기자로 일하는 것의 ‘두려움’을 점점 더 자주 느끼게 된다고 한다.

“기자를 하는 데 대한 사명감이나 자부심보다 두려움을 갖고 있어요.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두려움, 그리고 배려와 고려 속에서 균형을 맞춰야 한다는 두려움이죠. 언론이 얼마나 힘이 센지 알고 있기 때문에 항상 기사를 쓸 때 조심합니다. 기자가 가진 힘을 잘 알고 마구잡이로 휘두르지 말아야 한다는 것, 항상 독자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되새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