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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의 눈

[오늘] 간 큰 대통령

간 큰 남자들이 있다. 아침에 밥 달라고 소리치는 남자, 아내가 연속극 보는데 채널 돌리는 남자, 외출하는 아내에게 어디 가느냐고 물어보는 남자…. 중년 남성들 사이에 회자되는 ‘간 큰 남자’ 시리즈다. 우스갯소리지만 세상은 눈이 핑핑 돌아가게 달라지고 있는데 케케묵은 가부장적 권위를 내세웠다간 혼쭐나기 십상이란 세태 변화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여기 간 큰 남자가 한 명 더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장차관들을 모아놓고 “나라 전체가 온통 비리투성이”라고 일갈한 게 장안의 화제다. 대통령은 공직사회 부패와 비리, 관료주의와 무사안일 등에 화를 냈다. 모두 옳은 말씀이다. 한데 몇 년간 어디 외국에라도 나갔다 들어오신 분 같다. 대통령은 국정의 최고 책임자이다. 3자도 아니요, 비평가도 아니요, 남의 말 하듯이 할 입장도 아니다. 진물이 줄줄 흐르는 것을 보고서야 곪은 줄 알았다면 더 큰 문제다. 진작 알고 있었다면 여태까지 뭐했었는지 궁금하다. 

 <경향신문 DB>

집안에서 가장(家長)이 이런 식으로 “어쩌다 집안 꼴이 이 지경이 됐느냐”고 호통친다면, 가장의 권위를 세우기는커녕 볼썽 사나운 꼴을 당할 것이다. “그래 말 잘했다. 그동안 이 집의 가장이란 작자는 어디서 뭐하고 있었느냐”고 도끼눈을 치뜨고 덤벼드는 마누라에게 황혼이혼 안 당하면 다행이다. 사람들은 이런 사내를 간이 붓거나 큰 정도가 아니라 아예 배 바깥으로 나온 남자로 친다.

대통령이 거론한 문제들은 어제오늘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대통령은 지난해에도 “권력·토착·교육 등 3대 비리를 뿌리뽑아야 한다”고 했고, 그 전 해에도, 그 전전 해에도 비리 척결을 선언했다. ‘공정사회’는 어느 때, 어느 자리에서도 빠지지 않는 단골 레퍼토리가 됐다. 

그 사이 감사원 감사위원으로 간 대통령의 측근은 두세 달에 한번꼴로 수천만원씩을 챙기고, 금융감독원의 최고 수장은 자기가 주식을 갖고 있는 저축은행 감사를 살살해달라며 로비스트 역할을 하고 다녔다. 꿀항아리 속 지네를 집어내기는커녕 함께 코 박고 단물을 빨아먹은 것이다. 저축은행 사외이사로 달마다 수백만원씩 용돈을 받은 청와대 정무수석이 “뭐가 문제냐”고 역정을 낸 것도 그 동네 흙탕물에서는 나름 청정한 축에 낀다고 한 소리였을 것이다. 어제는 정무비서관이 또 검찰에 소환돼 감옥행 티켓을 손에 쥐고 대기 중이다. 

공직자는 ‘쯩’(證)이라도 있으니 허가난 도둑이라 치더라도 여행사를 경영하는 대통령 친구는 임금이 준 마패를 허리에 꿰찬 암행어사마냥 온 나라를 휘젓고 다녔다. 징역 2년6월을 선고받은 천신일은 국정원 간부를 전화 한 통으로 수족 부리듯 하고, 대기업 총수도 만나기 어려운 금융지주 회장에게 석 달간 30여차례나 전화를 걸어 특혜대출을 볶아댔다고 판결문에 나와 ㅁ있다. 

그러고 보면 국토해양부는 운없이 걸린 케이스다. 어느 부처라 할 것 없이 너도나도 비리 흙탕물을 철벅거리고 다니고 있음을 알려주는 빨간불은 오래전부터 깜박거려 왔다. 이명박 정부 들어 4년 사이 뇌물을 받았다가 징계를 받은 공무원이 2006년에 비해 5.5배로 폭증했다는 것은 행정안전부의 자료다. 국제투명성기구는 한국의 부패인식지수가 뚝뚝 떨어지고 있다는 발표를 해마다 내놓고 있다. 공무원 잡으라고 세금으로 월급주며 만들어놓은 공직 사정팀이 애먼 민간인 뒤나 캐고 다니는 사이 벌어진 일이다. 

한 솥 안에 있으면 밥이 선지 탄지 모를 수 있다. 어떤 때는 바깥의 눈이 더 정확하다. 지난주 가톨릭언론인협의회 주관으로 열린 ‘한국 리더십 위기’ 포럼에서 서울대 장달중 교수는 한 외국 언론인이 MB정치의 모습을 “패러독스(모순)라고 하더라”고 전했다. 

“연줄 인사를 계속하면서 공정사회를 외치는 모순, 병역 면제자로 안보 지휘부를 구성해놓고 국민들에게는 단합된 안보자세를 요구하는 모순, 정치 선진화를 외치면서 정치를 실종시키는 모순…정말 패러독스 그 자체다.”

나라가 이 정도로 썩었다면 의원내각제 국가에선 정권이 바뀌어도 몇 번은 바뀌었을 것이다. 영국 브라운 노동당이 장관과 의원들의 주택수당 부당 청구로 집권당 자리를 넘겨준 게 두 해 전 일이다. 일본은 부패 스캔들로 내각이 무너진 사례가 허다하다. 대통령제인 미국에서도 부통령이 탈세로 벌금을 부과받자 깨끗이 부통령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 대통령은 잘못됐단 말도 죄송하다는 말도 없다. 총리도, 감사원장도 묵언(默言)이다.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 오히려 대통령은 “부정과 비리가 우리 정권에서 유난한 게 아니다. 과거 10년, 20년 전부터 있었다”고 했다. 또 전 정권 탓이다. 정말이지, 우리 대통령은 간이 크시다.


박래용 디지털뉴스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