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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의 눈

“대포폰, 정권 덮치는 ‘쓰나미’ 될 수도”

박래용 디지털뉴스 편집장 leon@kyunghyang.com


요즘 화제는 아무래도 검찰 수사죠. 그중에서도 청목회 입법로비 의혹을 수사중인 서울 북부지검이 현역 의원 11명의 지역구 사무실을 압수수색하고, 줄소환을 예고하고 있는 게 단연 주요 이슈입니다.


야권은 “검찰이 의회를 상대로 선전포고를 했다”고 반발하고 있지만, 검찰은 “범죄혐의가 있는데 수사를 하지 않으면 그게 바로 정치수사”라고 맞받아치고 있습니다. 어느 쪽이 더 설득력 있을까요. 정치권이야 이 사건의 경우 피의자 격이니까, 반발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보다는 칼날을 쥐고 있는 검찰 내부를 들여다보는 게 현 상황을 이해하기가 쉬울 듯 합니다. 






의원 11명 압수수색 거사, 법무장관만 모르고 있었다

지난 5일 오후 바깥에서 의원 사무실 압수수색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국회 본회의장에 앉아 있던 이귀남 법무장관은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는 법무부 관계자가 들고온 긴급 메모를 보고서야 압수수색 사실을 접했다고 합니다. 이 장관은 의원들의 긴급 질의를 받고 “보고를 받지 못했다. 적절하지는 않은 것 같지만 검찰에서 그럴만한 사유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얼버무렸는데요. 몹시 당황한 표정이었다는 전언입니다.

요즘 검찰 안팎에선 주요 결정은 청와대 권재진 민정수석과 노환균 서울중앙지검장의 핫 라인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얘기가 파다합니다. 야당에서도 노 지검장이 검찰총장이나 법무부 장관을 건너뛰고 청와대와 직접 접촉한다는 의혹을 제기한 바 있습니다.

1년 전인가요. 2009년 9월 현재의 수뇌부 진용이 갖춰질 때 이런 사태는 어느 정도 예견됐습니다. 권재진 민정수석(57)은 사법연수원 10기로 경북고·서울대를 졸업한 정통 TK(대구·경북)입니다. 권 수석은 임채진 전 검찰총장의 중도사퇴 때나 천성관 전 검찰총장 후보자 낙마 때 모두 검찰총장 후보 1순위로 거론될 만큼 여권의 신임이 두텁다고 합니다. 김경한 당시 법무장관이 같은 TK 출신만 아니었더라도 99% 총장에 임명됐을 것이란 분석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가뜩이나 TK정권이라고 비판이 쏟아지는 마당에 법무장관과 검찰총장을 모두 TK출신으로 임명하기는 부담이 됐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청와대 민정수석으로 들어갔습니다.

김준규(55) 검찰총장은 연수원 11기로 권 수석보다 한 기수 아래입니다. 이귀남 장관(59)은 12기로 그 아래입니다. 결국 청와대 민정수석이 제일 선배이고 다음으로는 검찰총장, 법무장관이 제일 후배인 셈입니다. 사정 라인의 ‘거꾸로’ 지휘체계는 검찰 조직에 유례가 없는 일이어서 당시에도 우려의 목소리가 적지 않았습니다. 어느 조직보다 위계질서가 강한 검찰에서, 기존과 반대로 가는 기수 파괴 인사로 청와대는 사정라인을 완전히 장악했다는 분석입니다.



사진 왼쪽부터 권재진 민정수석(사법연수원 10기), 김준규 검찰총장(11기), 이귀남 법무장관(12기). 



공교롭게도 검찰의 의원 사무실 전격 압수수색이 실시된 날은 ‘청와대 대포폰’ 의혹이 막 타오르기 시작할 때입니다. 청와대의 불법사찰과 증거인멸 개입 정황이 속속 드러나면서 한나라당내에서도 재수사를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던 때였는데요. 당일 국회에선 사회분야 대정부질문이 잡혀 있었고, 야당의 ‘청와대 대포폰’ 추궁이 쏟아질 예정이었습니다. 이대로 뒀다가 민심에 불길이 옮아붙을 경우 청와대는 걷잡을 수 없는 위기에 빠질 수 있었습니다. '한국판 워터게이트’ 아니냐는 말까지 나왔으니까요.

결과는 어떻습니까. 다음날 아침 조간신문은 단 한 곳도 빠지지 않고 ‘의원 11명 사무실 동시 압수수색’ 기사를 1면 머리와 함께 종합면 주요기사로 다뤘습니다. 그때까지 정국의 최대 이슈였던 ‘대포폰’ 기사는 한 두 신문을 제외하곤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습니다. 그렇게 해서 일단은 ‘청목회’가 ‘대포폰’을 무찌르며 한 고비를 넘긴 형국인데요. 글쎄요. 오비이락(烏飛梨落)일까요, 대포폰 정국 물타기였을까요. 만약 물타기 의도였다면, 언제까지 이런 임시 변통식으로 대포폰의 몸통을 가릴 수 있을지 모를 일입니다.

‘거꾸로 타는 사정라인’ 靑 민정수석→검찰총장→법무장관 順

'거꾸로 사정라인’이 구축되면서 김준규 검찰총장의 입지가 애매해지지 않겠느냐는 우려는 초반부터 있었습니다. 검찰 선배인 민정수석과 사정수사의 실질적 지휘를 놓고 마찰을 빚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요즘 검찰내에선 김준규 검찰총장의 ‘말 발’이 잘 먹히지 않는다는 얘기가 들려오고 있는데요. 한마디로 검찰내 지휘가 안된다는거죠.

이런 상황에서 노환균 서울중앙지검장(53·연수원 14기)은‘검찰의 황태자’로 불리며 부쩍 힘이 실리고 있는 분위기입니다. TK에, 고려대에, 정통 공안검사 출신인 그는 MB정부의 ‘성골’로도 불리는데요. 지난해 8월 서울중앙지검장에 임명된 노 검사장은 1심에서 무죄가 난 한명숙 전 국무총리의 5만달러 뇌물수수 의혹 수사의 총책임자였습니다. 무죄 이후 노 지검장 바로 아래 3차장 검사와 담당 부장이 문책성 인사를 당했지만, 그만은 자리를 굳게 지켰습니다.

올 6월 ‘대포폰’ 의혹이 제기될 당시 서울중앙지검은 특별수사팀까지 꾸려 불법사찰 의혹을 두 달 넘게 수사했지만, 총리실을 뒤늦게 압수수색하는 등 석연치 않은 수사로 결국 흐지부지되고 말았습니다. 수사 결과는 발표문 한 장 없이 약식 브리핑으로 대충 넘어갔고요. 이후 ‘청와대에 정기적 업무보고’ ‘BH(청와대) 지시사항 메모’ ‘BH·민정수석·총리 보고용 문건에 민간인 사찰 관련 문구’에 급기야 ‘청와대에서 대포폰 지급’까지 온갖 증거들이 쏟아지고 있지만 검찰은 “재수사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고 요지부동입니다. ‘청와대 대포폰’을 폭로한 이석현 민주당 의원은 지난 4일 “대포폰을 만들어준 청와대 행정관에 대한 조사를 서울중앙지검장이 반대했다”고까지 주장했습니다.

대포폰 수사…차기 검찰총장·경찰청장 1순위 후보 휩쓸어 갈수도

노 검사장은 차기 검찰총장의 유력한 후보로 꼽히고 있습니다. 이강덕 경기경찰청장은 청와대 공직기강팀장 재직 당시 이인규 전 공직윤리지원관으로부터 사찰 내용을 보고받았다는 의혹을 받고 있습니다. 영포라인인 현 이강덕 경기경찰청장은 차기 경찰청장 후보 1순위에 올라 있습니다. 민간인 불법사찰은 검찰총장과 경찰청장 후계 구도와도 직결돼 있는 것입니다. 두 사람의 입지 뿐 아니라 대포폰 진실은 이 정권을 ‘쓰나미’처럼 휩쓸어 갈 수 있습니다.

청목회 뿐 아니라 C&, 한화, 태광그룹 비자금과 여기에 연루된 정치인 수사는 앞으로 뭐가 튀어나올지 알 수 없습니다. 언제든, 웬만한 이슈는 가리고 덮을 만한 카드를 검찰은 갖고 있습니다. 정부 전체로 보면 더 굵직한 카드는 얼마나 많겠습니까. 국민 생활과 밀접한 정책들도 언제든 발표할 수 있고, 여권의 깜짝 발언도 있을 수 있습니다. 모두 정권에 밀어닥칠 쓰나미를 막는 둑으로 활용될 수 있는 것들입니다. 





불법 혐의가 있어 수사한다는 데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 수사의 대상에 무슨 지위고하가 있겠습니까. 문제는 수사의 균질성(均質性) 입니다. 국회의원 사무실을 뒤지는 것처럼, 기업 오너 친인척을 발가벗기는 것처럼, 보통 형사사건에서 일반인들 다루는 것처럼, 그렇게 똑같이 대포폰 의혹도 파헤치라는 것입니다.

정권의 여론 호도(糊塗)에 속지 않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누구든 걸면 걸리는 의원 후원금 수사에 온 시선이 쏠려 있는 지금, 정·검 대치니 의회 말살이니 와글대며 야당이 헛 힘을 쓰고 있는 지금, 누군가는 웃고 있을거란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