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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사람들

'큰 거 한방' 보다 '일상적 부조리' 폭로

공익제보사이트 '경향리크스'로 세상을 바꿔가는 기자
[신문쟁이방송쟁이] 박래용 경향신문 디지털뉴스 편집장

이재덕 기자  matugis@danbinews.com 

"이른바 '큰 거 한방'이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작더라도 보통 사람들의 일상생활과 관련된 만성적 부조리를 폭로하는 것이 더 가치 있는 일 아닐까 생각합니다."

경향신문의 공익제보사이트 ‘경향리크스’가 ‘한국의 위키리크스'를 표방하며 문을 연 지 석 달이 지났다. 지난 달 3월23일 문을 연 직후부터 제보가 쏟아지기 시작, 지금까지 300여건이 접수됐고, 이 중 11건이 사실확인을 거쳐 보도됐다. 정진석 청와대 정무수석이 삼화저축은행의 사외이사였음을 폭로한 기사는 큰 파장을 일으킨 특종이었다. 그러나 지난 6일 경향신문 6층 인터뷰실에서 만난 박래용 경향신문 디지털뉴스 편집장은 ‘대형 특종’에 집착하지 않는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 경향신문 박래용 디지털뉴스 편집장. ⓒ 이재덕

"동사무소, 소방서, 파출소, 학교, 공장 등 일상에서 일어나는, 그래서 무감각하게 된 비리들이 제도적으로 개선된다면 그것이 세상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지난 4월 전국 법원의 인지대 비리를 폭로했던 기사가 그런 사례였다. 법원 직원들이 이미 사용한 수입인지와 법원증지를 새것처럼 위조해 재사용하는 방식으로 인지대를 가로챈 사실이 경향리크스를 통해 폭로됐다. 대법원은 개선조치를 내렸고 검찰이 수사를 시작했다.
 
‘위키리크스’식 제보에 사실 확인 취재 더해 

경향리크스의 모태가 된 것은 줄리안 어산지가 만든 위키리크스다. 지난해 말 위키리크스는 미국의 이중적 대외정책과 각국의 기밀을 담은 미 국무부의 외교전문을 공개해 세계적인 파문을 일으켰다. 주 튀니지 미국대사가 보낸 문건에는 튀니지 정부의 부패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났고 튀니지인들은 이 폭로내용을 모아놓은 ‘튀니리크스’를 만들었다. 이런 정보들은 올 초 튀니지의 시민혁명, 즉 ‘재스민혁명’을 촉발하는 계기가 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 즈음 ‘우리도 이런 사이트를 만드는 게 가능하지 않을까’하는 의견이 경향신문사 내에서 나왔다. 디지털뉴스국에서 곧 바로 검토를 시작했다. 3월 초에는 경향리크스의 윤곽이 거의 잡혔다. 하지만 마침 일본 대지진과 리비아 공습 등 대형 사건들이 터져 서비스 개시가 계속 미뤄졌다. 드디어 3월 23일, 온라인 경향신문을 통해 경향리크스의 탄생을 알리자 기다렸다는 듯 시민들의 제보가 쏟아졌다. 1주일 만에 20여 건의 내부고발이 들어왔다. 경향신문 기자들의 확인 취재 후 첫 기사가 3월 30일 1면에 실렸다. ‘사랑의 열매 모금회’ 워크숍에서 직무와는 상관없는 안보교육이 이뤄졌다는 기사였다.

▲ 빨간박스가 경향신문 1면에 실린 경향리크스 시민제보 뉴스. 왼쪽부터 '사랑의열매모금회 안보교육(3.30)','법원 인지대 비리(4.1)','정진석 삼화저축은행이사(5.18)'기사. ⓒ 경향신문

스웨덴 서버 통해 내부고발자 익명성 철저히 보호

박 편집장과 경향리크스 팀은 공익제보사이트로서 공신력을 유지하기 위해 제보자의 신원을 철저히 보호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국내 검찰의 수사력이 미치지 못하는 스웨덴의 서버업체와 계약을 맺었다. 바로 위키리크스가 이용하는 업체다. 스웨덴 당국은 위키리크스와 관련한 각국의 수사협조 요청에 일체 응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경향리크스는 제보자에게 개인정보를 요구하지도 않고 로그기록도 남기지 않는다. 제보내용을 전송할 때 암호화 과정를 거치기 때문에 정보유출 걱정도 없다고 박 편집장은 강조했다.

"종전의 제보시스템에서는 실명제 때문에 온라인상 신원이 드러나는 로그인을 안 할 수 없었죠. 그 자체가 내부고발자 입장에서는 큰 부담이 됩니다. 또 제보를 하려 해도 어디다 할지 막막하고, 막상 언론사 전화번호를 찾아 직접 전화하기엔 사람들이 소극적인 경향이 있죠. 경향리크스는 그런 점에서 부담 없이 제보할 수 있는 '직행통로'를 하나 더 만든 거라 보시면 돼요."

제보를 하려는 사람들은 경향신문 홈페이지의 경향리크스에 접속해 관련 문건이나 글을 전송하면 된다. 경향리크스 도움말을 보면 몇 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 절대 자기 집 컴퓨터로 보내지 말 것. 컴퓨터에 접속 기록이 남기 때문이다. 평소 자신의 활동지역에서 벗어난 지역의 피시(PC)방을 이용할 것, PC방을 이용할 땐 CCTV가 없는 곳으로 갈 것, 한글이나 워드파일보다는 보안성이 높은 PDF파일로 전송할 것. 주의사항을 읽다 보면 윌 스미스 주연의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나 맷 데이먼이 나온 ‘본 시리즈’를 보는 것 같은 긴장감에 사로잡힌다.

    

▲ 경향리크스 메인화면(좌)과 도움말(우). 도움말(빨간박스 부분)에는 제보자가 문건을 전송할 때 주의해야 할 사항들이 자세히 적혀있다. ⓒ 경향신문


접수된 제보는 경향신문 내부에서도 극비로 다뤄진다. 디지털뉴스팀의 경향리크스 담당자 1명과 박 편집장만이 제보내용을 열람할 수 있다. 경향신문사 외부에서는 제보내용에 접속조차 할 수 없다. 일단 제보가 들어오면 두 사람이 등급을 매긴다. 중요도에 따라 A,B,C,F 등급으로 나누는데, 공적인 성격이 강할수록 A등급에 가깝다. 개인의 사적 민원은 낮은 등급으로 분류된다. 사적 민원 중 공익성을 띠는 것은 C등급으로 분류되고 그렇지 못한 것은 F로 처리되는 식이다.

A,B,C등급으로 분류된 제보는 정치부, 경제부, 사회부, 전국부 등 해당부서로 보내져 기자들의 취재 후에 기사화된다. B등급 이상이면 대부분 기사가 되지만, C등급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몇 월 며칠에 제보가 들어왔고, 몇 월 며칠 해당부서로 이첩을 했고, 몇 월 며칠 기사가 났는지 진행흐름을 사이트 안에 일목요연하게 만들어놨죠. 제보내용이 사실과 달라 기사가 나가지 않았다면 경향신문 경향리크스 코너에 '취재결과 제보내용이 사실과 달랐다'고 공지합니다. 회사차원에서 경향리크스 제보내용에 관한 회의 같은 건 일절 하지 않습니다. 경향리크스에 어떤 제보가 들어오는지에 대해 다른 사람들을 전혀 알 수가 없죠."

외부 압력 있다면 경향 구성원들 가만 있지 않을 것

▲ 경향신문사 편집국 내부. ⓒ 이재덕


제보내용이 제대로 기사화된다는 믿음을 제보자에게 주는 것도 중요한 과제다. 언론사가 광고주의 압력이나 국가권력의 압력, 언론사 내부의 압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면 내부고발자들은 언론사에 제보하는 것을 꺼릴 것이다. 특히 언론에게 광고주의 입김은 막강하다. 경향신문도 이에 대한 비판을 피해갈 수 없다. 지난해 경향은 삼성광고수주에 어려움을 줄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삼성을 비판하는 내용의 김상봉 교수 칼럼을 누락하면서 구설수에 오른 일이 있다.

▲ 경향신문 박래용 디지털뉴스 편집장. ⓒ 이재덕

"당시 칼럼누락은 전적으로 제작상의 판단미스죠. 다만 구성원들이 잘못을 바로 인정하고, 지면을 통해서 독자들에게 사과하고 재발방지를 약속했던 것, 그게 굉장히 중요한 것 같아요. 일련의 교정작업들을 독자들이 지켜보면서 오히려 경향신문에 대한 신뢰가 더 두터워질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 연장선상에서 볼 때 경향리크스가 내부권력, 정치권력, 자본권력에 굴하지 않고 제보내용을 제대로 세상에 낼 수 있겠는가? 그런 압력이 있다면 경향신문사의 구성원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경향신문은 이미 구조가 그렇게 되어있어요"

실제로 삼성비판 칼럼이 누락됐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당시 막내 기수였던 공채 47기 기자들이 이에 항의하는 글을 회사게시판에 올렸다. 막내들의 ‘항명’을 시작으로 경향신문 기자들은 기자총회를 열고 보도원칙에 대한 토론을 벌였다. “우리는 광고로 언론을 길들이려는 부당한 시도와 자기 검열을 강요하는 내부 압력에 굴하지 않을 것”이라는 성명서도 발표했다. 며칠 뒤, 경향신문사는 1면에 ‘대기업 보도 엄정히 하겠다’는 사과문을 게재했다. 경향신문이 1998년 사원주주회사로 전환한 후 독립언론의 위상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 온 전통이 이런 움직임의 배경이 됐다.

이런 경향의 문화를 직접 만들기도 하고, 목격하기도 했던 박래용 편집장은 22년차 베테랑 기자다. 1990년 1월,  공채 29기로 경향신문사에 입사했다. 이후 경찰, 검찰 출입기자 등을 거치며 고엽제 후유증에 시달리는 월남참전용사에 대한 기사, 김현철씨 대선 잔여금 은닉 기사로 한국기자협회 이 달의 기자상 등을 수상했다. 연쇄살인범 지존파 단독 인터뷰, 김영삼 대통령 비서관이었던 장학로 씨 수뢰 사건 등 굵직한 사건들을 다루며 특종기자로 이름을 날렸고, 사회부장, 논설위원 등을 거쳤다.

경향리크스에 더 이상의 제보가 필요 없는 그날까지

박 편집장은 지난 3월 경향신문 블로그 '편집장의 눈'에서 "모든 것이 대중에게 공개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말했다. 태어난 지 이제 고작 백일인 경향리크스가 과연 한국 사회와 한국 언론 시스템 안에 제대로 안착할 수 있을까?

"내부고발자들의 용기로 제보가 들어오고 그것을 경향 기자들이 두려움 없이 기사화하고, 그런 과정을 통해 거악, 비리, 부조리가 바뀌는 것을 보여줘야죠. 안타깝지만 지금 우리나라에 너무나 많은 부조리가 벌어지고 있어 경향리크스에 제보가 풍성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먼 훗날 경향리크스에 제보가 없는 날이 왔으면 좋겠지만 그건 유토피아겠죠?"
 
[원문은 http://www.danbi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892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