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편집장의 눈

[편집장의 눈] 노무현의 시대


2005년 3월 27일 노무현 대통령이 청와대 출입기자단과 북악산을 오르고 있다. 바로 뒤 필자가 수첩을 들고 뒤따라가고 있다.(왼쪽 사진) 노 대통령과 필자, 조기숙 홍보수석이 줄줄이 산길을 걷고 있다. 맨 앞은 수행경호원.(오른쪽 사진)

 
 
디지털뉴스 편집장 박래용입니다.

청와대는 1년에 한 두 차례 대통령과 출입기자단의 동반 산행을 열곤 합니다. 참여정부 전반부에 청와대 출입기자였던 저도 노무현 대통령 재임시 함께 북악산에 몇 번 오른 적이 있습니다. 2005년 3월, 저의 청와대 출입 마지막 산행으로 기억합니다. 요즘은 며칠 전에 예고한다고 합니다만, 당시엔 기자들에게 2~3시간 전에 산행 소식을 전격 통보했습니다. 이를테면 일요일 아침 휴대폰에 ‘오늘 대통령님 출입기자단과 산행 예정. 오전 10시까지 춘추관 집결 요망’이란 문자를 보내오는 식입니다. 휴일 아침, 모처럼 늦잠을 자다 이런 문자를 받으면 아침도 먹는 둥 마는 둥, 세수도 하는 둥 마는 둥 허겁지겁 청와대로 달려가기 마련입니다. 평소 운동을 게을리 한데다 술과 담배에 찌들어진 몸에 난데없는 등산은 항상 힘겹습니다. 풀기자를 맡아 대통령 바로 뒤를 쫓아 올라가며 헉헉거리자 노무현 특유의 장난기가 발동된 것 같습니다.

 “박기자, 힘드신가”

평소 그의 상하 격의없는 대화법을 알고 있지만 대통령의 난데 없는 질문에 놀랐고, 저를 기억하는 것에도 놀랐습니다.

“(핵핵) 예, 죽겠습니다”

등산용 스틱으로 흙과 바위를 톡톡 두드리며 한 두 발짝 앞서가던 대통령이 말했습니다.

“뭐가 그레 힘드노. 나랏 일을 짊어지고 있기를 하나, 누가 발목을 잡고 흔들기를 하나. 힘들게 무에 있다고…허허허”

“(헐)……”

신년 벽두부터 보수쪽은 물론 진보 진영에게서도 날 선 비판을 받고 있던 때였습니다. 대통령 스스로도 공석에서 “나는 지금 마치 섬에 있는 느낌이다. 사방이 포위되어 있는 것 같다”고 말하던 때였습니다. 

뒤에 오던 조기숙 홍보수석이 한 마디 끼여들었습니다.

“날마다 청와대 패느라 힘들겠죠. 호호호” 

힘드나. 힘듭니다. 니가 뭐했다고 힘드나…. 신문사에선 선배가 후배에게 이런 농담을 노상 합니다. 전문 용어로는 ‘골 지른다’고 하죠. 줄줄이 한 명씩, 한 줄로 갈 수밖에 없는 산행 특성상 산행 풀기자는 대통령 바로 뒤에 따라가며 이동 중에 대통령이 한 발언과 제스처를 메모해서 동료 기자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지금와서 고백하면, 대통령이 저를 빗대 기자들을 ‘골 지른’ 이 대화는 제 수첩에만 적혀 있을 뿐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함께 갔던 동료기자들에게 늦게나마 죄송하다는 말씀을 전합니다. 

노 전 대통령이 창졸간에 떠난 2009년 5월, 저는 사회부장이었습니다. 충격을 진정시킬 새도 없이 영결식까지 매일 10여개 안팎의 지면을 만드느라 정신없는 하루하루를 보냈던 기억이 납니다. 일에 쫓긴 채 먹먹한 가슴만 문지르다 49재를 맞아서야 봉하마을에 내려가 향불을 피웠습니다. 그리고 그 곳, 부엉이바위를 한참 쳐다보다 돌아왔습니다.  

지난 21일 봉하마을에서 열린 김제동 토크 콘서트에 출연한 문재인 이사장이 활짝 웃고 있다. 김기남기자



벌써 2년이 지났습니다. 전국서 추모 물결이 일고 있지만, 분노와 슬픔이 지배했던 이전 추모 때와는 달리 희망과 다짐을 얘기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지난 주말 봉하마을에서는 김제동씨가 진행하는 ‘토크 콘서트’가 열려 한바탕 신나게 웃고 떠들었다고 합니다. 김제동씨는 묘역 앞에서 왕년의 유행가 ‘아파트’를 불러제꼈고,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오늘처럼 이렇게, 이제 슬픔을 넘어 밝게 웃으며 새로운 세상을 향한 비전을 찾았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가 말하는 ‘새로운 세상’이란 가난하고 배우지 못해도, 장애가 있거나 소외된 사람들도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보장해주고, 시민 누구나 당당하게 인간의 존엄성을 주장하고 누릴 수 있는 세상을 의미합니다. 사실, 웬만한 민주·복지국가에선 이런 바람은 소원이 아닌, 너무나 당연하게 이뤄지고 있는 것들이죠.

대통령 노무현은 시대의 모순에 분노하고 저항했습니다. ‘개혁의 꿈’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많은 소용돌이를 만들었습니다. 방법이 서툴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고, 콘크리트처럼 단단한 기득권을 부셔뜨리기 위해선 다른 방법이 없었다고 지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자신 의도하지 않은 설화(舌禍)로 손해도 많이 봤지만, 그는 피하지 않았습니다.

옳은 건 옳은 것입니다. 그가 뿌린 참여민주주의, 국가균형발전, 권력기관의 개혁, 특권 타파 등은 모두 미완으로 남아 있습니다. 어쩌면, 씨앗을 뿌리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갔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노무현의 시대’는 이제 시작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연세대 김호기 교수는 경향신문 기획 ‘대화’에서 “노무현의 시대는 지나간 게 아니라 아직 오지 않았다. 노 전 대통령은 목숨을 내던짐으로써 비로서 자신의 시대를 열었다”고 했습니다.

의회민주주의를 채택한 국가에서 정권은 이 정당, 저 정당을 왔다갔다 할 수 있습니다. 그게 정상입니다. 하지만 어느 정권에서도 무너뜨려선 안될 기본이 있습니다. 국민이 주인이고, 주인은 마땅히 존엄되어야 하고, 그 존엄성은 누구도 훼손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사람사는 세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