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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의 눈

[편집장의 눈] '양지탕'의 추억

디지털뉴스 편집장 박래용입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때입니다. 상투적이지만 해마다 이맘때면 신문사는 또 10대 뉴스, 뜬별 진별 같은 결산 기사를 쓰곤 합니다. 새해에 바뀌는 것들도 단골로 등장하죠. 어떤 것은 나름 의미가 있어 전통적으로 유지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일부는 이런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회의가 들기도 합니다. 독자 관점이 아닌, 공급자 중심 발상에서 나온 거라 생각하면 아직까지 언론만 소비자 중심 서비스를 실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자성해 봅니다.

‘형님 예산’ ‘영부인 예산’으로 통칭되는 새해 예산안이 날치기 처리된지 2주일 됐습니다. 날치기 직후 한때 움찔했던 한나라당은 다시 이대로 밀고 간다는 강성 기조로 잡은 듯 합니다. 한마디로 “우리가 잘못한게 뭐 있느냐”는 거죠.




여의도에는 ‘양지탕’이라는 꽤 유명한 설렁탕집이 있습니다.
한나라당 김무성 원내대표 등 원내대표단은 날치기 강행한 날 저녁 양지탕에 모여 자축연을 했다고 합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몸싸움의 달인인 김성회 의원이 ‘병원에 입원한 줄’ 알고 격려 전화를 했을 때 김 의원이 전화를 받은 곳이기도 하죠.

1996년 12월 24일 밤(엄밀히 말하면 25일 새벽) 당시 여당이었던 신한국당 지도부도 노동법을 날치기 처리한 후 이곳 양지탕에 모여 환호작약했으니 묘한 공통점이 있네요.

한나라당 홍준표 최고위원은 지난 13일 최고위원회의에서 바로 이 노동법 날치기 처리 경험을 꺼냈습니다.



한나라당 홍준표 의원. 경향신문 자료사진


“지난 12월 8일 본회의장 몸싸움을 보면서 나는 96년 12월 25일 노동법 기습처리를 생각했다. 당시 우리는 승리했다고 25일 아침에 (여의도) 양지탕에 가서 거사를 축하하고 축배를 들었다. 그러나 그것이 YS 정권의 몰락의 신호탄이었다. 그 이후 바로 한보사건이 터지면서 YS정권은 몰락하고 IMF 금융위기가 초래되면서 우리는 50년 보수 정권을 진보 진영에게 넘겨줬다”

당시 노동법 처리 현장에는 홍 최고위원 외에 한나라당 안상수 대표, 이재오 특임장관, 김문수 경기지사 등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공천 개혁에 따라 영입된 초선 의원들이 적잖게 있었습니다.
국민은 분노했습니다. 야당과 노동계, 시민단체들은 장외 투쟁에 돌입했습니다. 취임 이후 고공행진을 펼치던 YS의 지지도는 폭락했습니다. 언필칭 문민정부라 했기에 국민의 배신감은 더욱 컸던지도 모릅니다.

노동계의 거센 반발과 비판여론이 지속되자 결국 YS는 97년 1월 21일 노동법 재논의를 지시했고, 마침내 3월 10일 여야는 복수노조 허용, 정리해고 2년 유예, 노조 정치활동 금지 규정 삭제 등을 골자로 하는 신노동법을 통과시켰습니다.

노동법은 재개정됐지만 사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곧이어 한보 그룹 부도 사태가 터졌고, 당시 ‘소통령’으로 불렸던 김 전 대통령의 아들 현철씨 비리가 불거졌습니다. YS 정권은 급격하게 레임덕의 수렁에 빠졌고 이어 15대 대선에서 국민의 정부가 출범했습니다. 돌이켜보면 노동법 파동이 국민의 정부 출범의 시발점이 된 것입니다.


우리 군의 연평도 일원 해상사격훈련에 북한군이 ‘타격‘을 가하겠다고 위협한 가운데 
19일 연평도 인근 바다에 떠 있는 해군 함정 위로 태양이 떠오르고 있다. AP통신


한반도가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입니다. 우리 정부는 연평도 해상 사격훈련을 지난달 23일 북 포격 당시와 똑같이 그 자리에서 다시 재현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북한은 포 사격 강행때는 제2, 제3의 타격을 가할 것이라고 노골적으로 위협하고 있죠. 사격 훈련이 자칫 확전까지 이어질 수 있을 정도로 한반도 긴장 수준은 최고조로 높아진 상황입니다.



오죽하면 주변국에서 나섰을까요. 중국은 “한반도에서 다시 유혈충돌이 빚어진다면 남북한 국민에게 재앙을 몰고와 동족상잔의 비극이 재연됨은 물론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해쳐 화가 주변 국가들에까지 미칠 것”이라고 우려하는 성명을 냈습니다.
러시아 외무장관도 “한반도 사태의 전개를 주의 깊게 관찰하고 있다. 각 측에 최대한의 냉정과 자제를 요구한다”고 밝혔습니다. 유엔 안보리에선 한반도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긴급회의까지 열렸습니다. 전쟁이 발발할 경우 국제사회에선 남한의 포격 훈련을 ‘선(先) 도발’로 간주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망신입니다. 우리 군은 “우리 영해에서 일상적인 사격훈련조차 못할 이유가 없다”며 반드시 사격훈련을 할 것이라고 천명하고 있지만, 일상적 사격훈련 마저 유엔 안보리 논의 테이블에 오를 만큼 국제사회에서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급기야 유엔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의 감시까지 받게 된 것은 한반도 평화관리를 주도적으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를 낳고 있습니다.

현재 남북의 대치는 어느 것 하나 평화적이거나 안정적으로 관리되지 않고 있어 만의 하나 조그마한 불상사 하나만 일어나도 상황이 어느 방향으로 튈지 알 수 없는 초긴장 상태입니다. 연평도 주민들은 이구동성으로 사격훈련 중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쌀 수매 때문에 섬에 들어온 한 할머니는 “훈련 안 하는 게 연평도 주민들이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길”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주민들은 굳이 사격훈련을 해야 한다면 분위기가 가라앉은 다음에 해도 되지 않느냐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일부 친여 보수언론은 엊그제 1면 머리기사로 훈련 강행 소식을 전하며 ‘북 또 도발할테면 해봐라. 연평도 포 사격 그곳서 다시 한다’는 제목을 달았더군요. 한번 전쟁을 해보자는 것인가요. 오기입니까, 기싸움입니까.

정치란, 안보란 국민의 걱정을 덜어주고 평안케 해주는 것이 제1의 가치일 것입니다. 거꾸로 국민을 불안과 공포에 오들오들 떨게한다면 도대체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훈련인지 모를 일입니다.

연평도 사격훈련은 화약고에 성냥을 그어대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혹여 정치적 위기를 모면코자 국민의 생명과 재산과 안전을 담보로 딴데로 눈길을 돌리려 하는 것이라면, 역사에 국가에 민족에 이보다 더 한 죄는 없을 것입니다.

송년사에 걸맞지 않게 주제가 무거웠습니다. 제 마음도 무겁습니다. 전운(戰雲)의 먹구름이 걷히고 하루빨리 밝은 햇살이 온 나라에 따뜻하게 비추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