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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확확 라운드업

<라운드업> 다시, 전태일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태일이는 사람을 참 좋아했어. 같은 노동자를 너무도 사랑했다고.그러니 열사나 투사보다 그냥 동지라고 불러 줬으면 좋겠어. 태일이는 지금도 노동자와 함께하는 동지라고, 제발 그렇게 불러달라고 전해줘.”




다시 전태일이다

11월 13일은 청계천 피복공장 노동자들의 열악한 현실, 고도성장기 대한민국의 노동현실을 온몸으로 고발한 전태일 열사 추모일입니다. '
전태일 이후' 40여년... 이제는 달라졌다고 생각했지만 다시 과거로 돌아가고 있는 듯한 노동 현실을 되짚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여기, 한국사회에서 '전태일'의 의미를 되짚어 보는 글과 기사들을 모아 놓습니다.


2011

▶ 11.9


전태일 열사가 분신하기 한달 전, 경향신문이 평화시장의 참상을 보도했습니다. 기자협회보는 11월 10일 ‘전태일 열사 분신 한달 전, 청계피복 참상 전한 기자 있었다’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는데요. 당시 이 기사를 썼던 기자가 고 기남도 경향신문 기자였다는 사실이 새로이 밝혀졌습니다.
당시엔 노동 문제에 대한 보도가 어려워 기자의 바이라인을 싣지 않고 보도했기에, 기사를 쓴 기자가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전태일 분신 한달 전, 경향신문 ‘평화시장 참상’ 보도했다



아래는 기자협회보의 보도입니다.

전태일 열사 분신 한달 전청계피복 참상 전한 기자 있었다

“경향신문사 앞에서 가슴을 조이며 기다리던 전태일은 새로 나온 석간식문 한 장을 들고 미친 듯이 평화시장을 달렸다. 삼동회 회원들은 바라던 기사가 난 것을 확인하자 환호성을 터뜨리며 모두 얼싸안았다.”(전태일 평전 중)

1970년 10월 7일 경향신문 사회면 7면 머리기사로 실린 ‘골방서 하루 16시간 노동’이라는 기사는 평화시장 노동자들에게 기쁨이고 행복이었다. 전태일의 ‘대학생 친구’로 잘 알려진 장기표 전태일재단 이사장은 “경향신문에 평화시장의 참상이 보도된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전태일에게 엄청난 기쁨과 희망을 줬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높이가 1.6m밖에 안 돼 허리도 펼 수 없는 2평 남짓한 작업장, 먼지 가득한 그곳에 15명 정도씩 몰아넣고 종일 일을 시켜 폐결핵, 신경성 위장병까지 앓고 있는 어린 소녀들, 저임금에 휴일도 모른 채 일을 하고 있지만 건강검진은커녕 근로기준법에 담긴 노동자 기본 권리도 박탈당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故 기남도 기자는 누구인가
 

청계천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비참한 실태를 보도했던 경향신문 고(故) 기남도 기자에 대해 지인들은 “정의로운 기자였다”고 입을 모았다. 
기 기자는 1939년 1월 23일 전라남도 광주에서 태어나 광주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고려대 법과대학 행정학과에 입학했다. 외무고등고시에서 두 차례 낙방한 뒤 생계를 꾸리기 위해 1965년 12월 경향신문사 입사했다. 
기 기자는 사회부에서 줄곧 기자생활을 했고 노동청을 10년 넘게 출입하며 노동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기 기자는 1968년 강화도 내 인조견직물공장에서 벌어졌던 해고 사건에 대해 “아쉬운 기업의 아량”이라는 제목으로 기업의 행태를 비판했고, 1970년 10월 평화시장의 참상을 보도해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그동안 이 보도의 주인공이 알려지지 않았던 것은 해당 기자가 다칠 것을 우려해 기사에 이름을  넣지 않았던 이유가 컸다. 이후에도 기 기자는 1972년 9월, 법에 명시된 노동자의 단체교섭권을 근거로 악덕 기업주의 사례를 고발하는 등 노사관계 기사를 주로 썼다. 




2010

전태일 추모 열기가 어느 때보다 뜨겁습니다. 현실은 더욱 '뜨겁습니다'. 

▶ 경향신문은 2010년 한국 사회에서 '전태일의 의미'를 생각해보는 기획을 시작했습니다.


<전태일 평전>을 쓴 고 조영래 변호사는 “전태일의 몸을 불사른 불꽃은 ‘인간 선언’의 불꽃이었다”고 했다. 전태일 타계 40주년인 2010년에도 전태일의 ‘인간 선언’은 미완성이다. 

많은 노동자들이 인간과 노동기계를 가르는 선을 밟고 위태롭게 서 있다. 그들의 숨결에서 기름 냄새가 배어 나오지만 그들의 몸은 기름칠 못한 기계처럼 삐걱거리고 있다. 잔업과 저임금에 시달리면서도 그 일자리나마 잃을까 노심초사하고 있다.


▶ 얼마 전에는 임금 체불에 항의하며 건설기계 노동자 한 명이 분신해 결국 숨졌습니다.

“이게 어제 오늘 일입니까.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모든 근로자들이 당하고 있는 일입니다. 건설기계 노동자들은 모두 빚쟁이가 돼 있다 이겁니다. 최저 입찰가 때문에 하청업체는 견딜 재간은 없고, 그에 따라 임금체불은 만연하고….” (덤프트럭 운전사 박모씨·42)



▶ 10월 30일에도 경북 구미의 KEC에서는 노조 지부장이 분신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민주노총이 10월 31일 서울 한강성심병원 앞에서 구미 KEC 공장에서 농성 중이던 김준일 금속노조 구미지부장의 분신과 관련, 기자회견을 열고 경찰의 과도한 공권력 집행을 규탄하고 있다. | 경향신문 김창길 기자 


가슴 아픈 사건들 속에서, 전태일을 조명하려는 노력은 더욱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 얼마 전에는 서울 청계천 6가 버들다리가 '전태일 다리'라는 공식 명칭을 얻었습니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는, 전태일을 기리려는 많은 이들의 노력이 있었습니다.

‘청계천 버들다리를 전태일다리로’ 외치는 사람들
“전태일 열사는 자신을 희생하며 시대의 징검다리 역할을 했는데 일신이 편한 이 시대에 사는 우리들은 선뜻 그 다리를 건너려 하지 않는다. 20대들에게 ‘주위 좀 돌아보자’고 외치고 싶었다.”



▶ 경향신문 손동우 기획에디터는 블로그 [정동만필]에서 '전태일 다리'를 바라보는 소회를 전했습니다.

[손동우의 정동만필] ‘전태일 다리’와 슬픈 전태일



▶ 
실천문학사에서는 일제 시대인 192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서울을 배경으로 한 노동시들을 모았습니다.



청량리와 서울역, 평화시장과 구로공단, 이태원에 이르기까지 서울의 도시 공간이 노동의 관점에서 어떻게 해석되는지를 노동시를 통해 바라보는 작업입니다.

노동자 피땀으로 세워진 빈곤과 차별의 도시 서울



▶ 전태일을 떠올리면서, 조영래 변호사의 <전태일 평전>을 빼놓을 수는 없지요.




▶ 전태일 열사를 추모하는 책도 출간됐습니다.






▶ 젊은 시절 청계피복노동조합의 조합원이었던 박계현 전태일재단 사무총장은 "전태일이 오늘날 살아있다면 청년실업에 고통 받는 청년들이나 비정규직들이 있는 곳으로 가고자 했을 테고 그들을 위해서 투쟁했을 것"이라 말합니다.

[월간 노동세상 41호] 지금, 전태일의 ‘풀빵’이 필요하다  
전태일 동지가 차비를 털어서 시다들에게 나눠준 풀빵은 단순히 그들의 허기를 달래준 빵 몇 조각을 뜻하지 않는다. 좀 더 나은 노동자가 나보다 어려운 노동자를 향해 던지는 사랑이고 연대인 것이다. 오늘날 정규직 노동자가 비정규직 노동자를 향해 사랑하고 배려하고 연대해야 한다는 표상일 게다. 이것이 40주기를 즈음한 전태일 정신 아니겠는가. 


▶ 서울시는 전태일 40주년 기념 전시물들을 강제철거했다고 합니다.

서울시  전태일 40주년 기념 전시 강제 철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