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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의 눈

[편집장의 눈] '화무십일홍'

디지털뉴스 편집장 박래용입니다. 새해 인사가 늦었습니다. 행복하고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연초부터 와글와글 시끄럽습니다. 어느 정권이나 임기 마지막 해는 레임덕 현상이 나타나긴 했지만 이 정부는 유독 심한 것 같습니다. 새해 벽두부터 집권 여당인 한나라당은 전당대회 ‘돈 봉투’ 파문으로 일대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나온 얘기를 종합하면 고승덕 의원에게 돈 봉투를 줬다는 당 대표 후보는 박희태 국회의장(73)으로 압축이 되고 있습니다. 박 의장 본인은 “사실 무근”이라고 완강히 부인하고 있으니 수사 결과를 지켜봐야겠습니다. 사건 전개에 따라 어쩌면 ‘대한민국 의전 서열 2위’인 입법부 수장이 검찰 조사를 받는 헌정 사상 전무후무한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1월 10일자 경향신문 '김용민의 그림마당'
 
 
한나라당은 2008년 18대 총선 공천에서 개혁이라는 명분으로 현역 박희태 의원을 탈락시킨 바 있습니다. 당시 정치적 생명이 끝났다는 평가를 받았던 그는 이명박 정부 출범과 함께 친이계의 전폭적 지원을 등에 업고 원외 신분으로 집권당 대표에 화려하게 복귀했습니다. 
반개혁으로 공천에서 탈락시킨 사람을 당 대표로 앉히는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지만, 그때는 그런 정도의 기용은 시빗거리도 안됐던 모양입니다. 이어 2009년 10월 경남 양산 재선거에 출마, 당선된 뒤 국회의장까지 차지했으니 정치인으로서는 천수를 누린 셈입니다. 
 
지금 박 의장은 전 수행비서가 중앙선관위 디도스 테러 주범으로 구속된 데 이어 자신은 ‘돈 대표’ 의혹까지 받고 있으니 정치 말년이 이렇게 흉할 수가 없습니다. 1988년 13대 국회 때 민정당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한 이래 탄탄대로를 걸어온 그로서는 일생 최대 위기에 직면한 모습입니다. 떠나야 할 때 떠나지 못하고 손 안에 들어온 권력을 움켜쥐고 있는 사이 시커먼 먹구름이 머리 위로 다가온 것입니다.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74)에게도 심상치 않은 구름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양아들로 불리는 정용욱 전 정책보좌관은 온갖 비리에 연루됐다는 의혹을 뒤로 하고 지난해 10월 태국으로 달아났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검찰 수사 착수 정보를 어떻게 접하고 발빠르게 내뺐는지 역시 뭐가 달라도 다릅니다. 그 양아들은 지난해부터 증권가 정보지 등에 단골로 거론됐던 인물입니다. 2010년 부친상 때 관련 업체로부터 받은 부의금이 억대가 넘는다거나 지난해 최 위원장의 여비서와 재혼할 때는 업체에 청첩장을 돌리고 축의금을 걷는다는 얘기가 나돌았습니다. 
청와대 민정수석실이 “정씨의 재혼과 억대 축의금 얘기가 나오기에 경고를 한 차례 줬다”고 밝힌 것을 보면, 사정 당국에서도 어느 정도 동향은 파악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의혹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습니다. 교비를 수백억 횡령한 혐의로 구속된 한국방송예술진흥원 이사장이 최 위원장 최측근에게 수억원을 줬다는 사실은 비리의 끝자락이 언뜻 잡힌 것 뿐입니다. 

 
최 위원장은 이 정부 들어 방송·통신·케이블·IT 분야의 모든 권한을 한 손에 움켜쥐고 행사함으로써 ‘방통 대통령’이라 불렸습니다. 그 권력을 바탕으로 조선·동아·중앙일보 등 친여 언론사에 종합편성채널을 안겨줬고, 또 그 종편에 광고를 배정하라고 기업체들을 압박하기도 했습니다. 오죽하면 기업들 사이 ‘조중동 광고영업본부장’이라는 얘기가 나왔겠습니까.
 

대통령의 친형 이상득 의원(76)은 15년 동안 보필했던 최측근 보좌관이 10억여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되면서 그동안 범접할 수 없었던 성역이었던 그에게도 위기가 닥치는 듯 합니다. 의원실의 비서 7명 중 5명이 서로의 계좌를 통해 뭉칫돈을 주고 받았다니 주군(主君)의 권세는 어떠했을지 짐작이 갑니다. 
그는 이명박 정권이 출범할 때부터 ‘영일대군’ ‘만사형통(兄通)’ ‘상왕(上王)’으로 불리며 국정 전반에 걸쳐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해왔습니다. 청와대·국정원·내각·공기업 가릴 것 없이 ‘SD사람’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지 않은 곳이 없고, 국회 예산안 처리 때마다 시장·군수도 모르는 ‘형님 예산’이 수백억, 수천억씩 내려오더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인터넷에서 퍼온 그림입니다. <도둑적으로 완벽한 정권> 각종 비리의혹 현황도

 
친이 직계인 정두언·정태근 한나라당 의원은 자신들이 불법사찰을 당했다며 그 배후로 이 의원을 지목한 바 있습니다. 그 역시 2008년 총선 때 한나라당 소속 의원 55명이 불출마 요구 성명까지 내며 정계 은퇴를 촉구했지만, 끄떡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올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긴 했지만, 이것으로 모든 게 끝났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세 사람은 모두 70대란 공통점이 있습니다. 더불어 나라를 좌지우지해왔다는 점도 같습니다. 대한민국이 세계와의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시기에 세 명의 70대 노인들이 주요 포스트를 꿰차고 나라를 위해 국민을 위해 무슨 일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올 것이 온 것 뿐입니다. 억울함이 있으면 풀고, 잘못이 있으면 처벌받으면 됩니다. 세 사람이 그렇게 주장했던 국가의 기강과 권위가 걸린 문제입니다. 세 분을 통해 아직 이 나라에 법과 정의가 살아있다는 것을 후대가 느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