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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의 눈

[오늘] 자진 귀국, 그 후

자기 비호는 동물의 본능이다. 죽은 척 꼼짝않기, 몸을 크게 부풀리기, 독한 냄새 풍기기 등 위험상황에 대처하는 동물들의 자구책은 가지가지다. 다리가 짧아 빨리 달리지 못하는 고슴도치는 온몸을 가시로 뒤덮었다. 인간이란 동물은 몸뚱아리로는 생존능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위기에 닥치면 고작 눈을 깜빡이거나 식은땀을 흘리는 정도다.
대신에 인간은 생각하는 사고능력을 키워갔다. 어떻게 하면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을까, 피해를 최소로 줄일 수 있을까. 머리 굴리기는 인간이 가진 최고의 생존책이며, 날로 진화해왔다.

‘1도 2부 3수’는 그 중 일례다. 사건·사고가 터지면 도망이 상책이고, 잡히면 부인하고, 그래도 안 통하면 수습하라는 것이다. 이것도 갈수록 발달해 수습 방법만 따로 떼내 ‘빽·돈·법’이란 파생 이론이 만들어졌다. 첫째는 빽, 둘째는 돈을 써서 해결해보고 그래도 안되면 법을 통해 빠져나간다는 것이다.

부산저축은행 로비스트 박태규씨 (경향신문DB)


요즘 큰 뉴스에 묻혀 존재감이 없는 핫 이슈가 하나 있다. 부산저축은행 금융비리의 핵심인 박태규 얘기다. 그는 지난 4월 검찰 수사가 시작되자 캐나다로 달아났다가 지난 주 소리없이 자진 귀국했다. 퇴출위기에 몰린 부산저축은행이 정·관계를 상대로 벌인 구명로비에서 핵심 역할을 맡아 로비와 관련된 비밀을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인물로 꼽힌다. 뜬금없이 삼성꿈장학재단과 포스텍이 생돈 500억원씩 부산저축은행에 출자토록 하는 데도 개입했다.
그런 그가 자진 귀국했단다. 줄행랑이 최고라며 내뺐던 그가 지금 이때 슬그머니 들어온 데는 곡절이 있을 것이다. 수습이 다 끝났다는 얘기다. 그는 곽노현 서울시교육감 수사가 공개된 다음날 귀국했다. 절묘한 타이밍이다. 그가 신통한 예지력을 지녀 곽노현 이슈가 빵 터질 날을 알고 있었는지, 보이지 않는 손이 사전에 조율해줬는지는 알 수 없다.
아니나 다를까 언론은 온통 곽 교육감 사건에 매달리고 있고, 박태규에 대한 관심은 뒤편으로 밀려나 있다. ‘빽·돈·법’이란 수습 이론에 ‘시(時)’를 하나 더 추가해야 할 판이다.

대통령의 친구 천신일은 ‘궐 밖 정승’으로 온갖 권세를 누리다 꼬리가 잡히자 일본으로 달아났다. 그는 지난해 11월 북한의 연평도 포격으로 온 나라가 난리 북새통일 때 귀국 비행기를 탔다. 검찰은 천신일의 개인비리 한두 개를 엮어 기소하는 선에서 그와 관련된 모든 의혹을 종결시켜 줬다. 불고불리(不告不理). 기소가 없으면 심리도 없다. 검찰이 기소하지 않는데 법원이 죄를 물을 수는 없다.

박연차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 미국으로 도망간 전 국세청장 한상률도 동일본 대지진과 리비아 폭격에 세상의 이목이 쏠려 있는 틈을 타 귀국했다. 그에겐 태광실업 표적 세무조사, 그림·골프를 통한 인사청탁, 세무조사 무마 대가로 뇌물을 받은 의혹들이 무수히 쏟아졌지만, 검찰은 기업들로부터 자문료 얼마 받은 혐의로 불구속 기소하는 데 그쳤다.

권력형 비리 사건으로 주목받았던 인물들이 해외로 달아나고, 딴 뉴스에 눈이 팔려 있을 때 슬그머니 들어오면, 기다렸다는 듯이 개인비리로 정리해주는 수순은 이제 주요 사건의 마무리 과정으로 정형화된 것 같다. ‘도망가고 부인하고 그 다음에 수습하라’는 세간의 속설도 정설(定說)처럼 굳어졌다. 이런 사건에서 권력 비리의 꼬리를 잘라주고, 몸통을 지켜준 검사들은 한결같이 승승장구하며 요직을 꿰차고 있다.

얼마 전 만난 한 검찰 간부는 “지금 검찰은 TK(대구·경북)와 고려대 두 축만 있다. 여기에 끼지 못한 나머지는 기타 검사가 됐다. 1%의 정치검사들 때문에 전체 검찰이 불신받고 욕먹고 있는 것이다. 실력있고 신망받는 선후배들이 이런 조직에 실망하며 떠나고 있다. 검찰을 재건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다”고 했다.

검찰을 떠나는 고위간부들도 퇴임사에서 비슷한 얘기를 하고 있다. “국민들이 보내는 따가운 시선을 따뜻한 시선으로 만들어야 한다”(차동민 서울고검장), “검찰의 위기 원인은 바로 우리 안에 있다”(황교안 부산고검장), “수사를 ‘칼’이라고 하는데 불행한 마음으로 쓰는 칼은 살상용 흉기가 된다”(조근호 법무연수원장).

모두 옳은 진단이다. 궁금한 것은 왜 재직 중엔 아무말 없다가 퇴임 때가 돼서야 뒤늦은 ‘참회록’을 남기느냐는 점이다.
박태규 수사가 천신일·한상률에 이어 검찰사에 또 하나의 오점으로 기록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 귀국 직후부터 영장실질심사를 거부했다느니, 입을 열지 않고 있다느니 하는 보도를 보면 마무리가 어떻게 정리될지 짐작도 간다. 언제부터 검찰 특수수사가 피의자 입만 쳐다보게 됐는지 모르겠다. 저축은행 비리를 놓고 국정조사에 특검까지 하자며 온 나라가 들끓었던 게 불과 두세 달 전의 일이다. 식은 냄비마냥 하도 관심들이 없기에 꺼낸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