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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의 눈

[편집장의 눈] 검찰과의 전쟁

디지털뉴스 박래용 편집장입니다. 한상대 신임 검찰총장의 섬뜩한 ‘공포 취임사’가 화제입니다. 그는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병역면제와 위장전입, 탈세, 부동산투기 등 이른바 MB정부 공직자들의 4대 필수과목에 모두 해당한다고 해서 야당으로부터 부적격 판정을 받았던 인물입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런 의혹들에 아랑곳없이 검찰총장 임명을 강행했습니다. 한 총장은 청와대에서 임명장을 받고 돌아오자마자 취임식을 열고 “종북좌익세력과의 전쟁을 선포한다”고 밝혔습니다. 취임사는 ‘전쟁’ ‘응징’ ‘제거’ ‘싸움’이란 전투 용어로 가득했습니다. 한 총장은 취임사를 직접 썼다고 합니다.

지난 12일 이명박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받은 후 함께 걸어가고 있는 한상대 검찰총장(왼쪽)과 권재진 법무장관(오른쪽).


형법은 ‘범죄와 형벌을 미리 법률로 규정하여야 한다’는 죄형법정주의를 기본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법률이 없으면 범죄도 없고, 법률이 없이는 형벌도 없다”는 이 원칙은 근대 이후 문명국가의 형벌제도를 지배해 왔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법률은 제정법만을 의미합니다. 아무리 사회적으로 비난받아야 할 행위라 할지라도 법률이 범죄로 규정하지 않았다면 처벌할 수 없으며, 법률이 규정한 형벌 이외의 처벌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죄형법정주의의 근본적 의의는 국민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국가권력의 자기 제한에 있습니다. 권력자가 범죄와 형벌을 마음대로 전단하는 죄형전단주의(罪刑專斷主義)와는 대립되는 원칙입니다.

종북좌익세력이란 우리 형법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이념적, 정치적 용어입니다. 공처가 세력, 강심장 세력, 불평불만 세력, 결벽증 세력과 마찬가지입니다. 그 정의와 범위는 너무 추상적이고 막연해서 어디부터 어디까지인지 특정하기 어렵습니다. 법률에 없는 죄를 처단하겠다는 것과 다를바 없는 것이죠.

한상대 검찰총장이 지난 12일 열린 취임식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이를테면, 누군가 이 정부의 4대강 정책을 조목조목 비판했습니다. 공교롭게도 북한에서도 같은 취지로 MB 정부를 비난했다고 치면, 그는 종북세력입니까.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인도적 대북 식량지원을 촉구했습니다. 반 총장은 종북좌익세력인가요. 노동, 경제, 반(反)복지 정책 등에 대해 정부를 비판하고 견제하고 감시하면 누구는 괜찮고, 누구는 종북세력입니까. 그 기준은 무엇이고, 판단은 누가 내리는 것입니까.

우리나라는 냉전시대를 거치며 국가보안법, 형법상 간첩죄, 명예훼손죄 등 갖가지 법률과 조항이 입법과잉이라 할만치 즐비한 상태입니다. 유엔 인권이사회 등 국제사회에서는 줄기차게 이러한 악법과 독소조항에 대해 개정과 폐지를 권고해오고 있지만 그 얘기는 여기서 논외로 하겠습니다. 어쨌든 현행법을 위반했다면 법이 정해놓은 바에 따라 처리하면 될 일입니다. 따로 무슨 전쟁을 선언할 필요도, 이유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불량식품과의 전쟁, 부실공사와의 전쟁, 반금융사범과의 전쟁, 성폭행범과의 전쟁은 왜 선포하지 않나요. 이런 범죄는 중요하지 않은 겁니까.

검찰이 언론에 노상 당부하는게 있습니다. 제발 앞서가지 말고, 몰아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직 소환조사도 하지 않고, 특정되지도 않은 범죄에 대해 언론에서는 이미 유죄로 규정하고, 선고까지 다 내린 것 처럼 보도하고 있다는 푸념입니다. “우리는 법률가”라며 국민의 분노는 잘 알겠지만 법리에 없는 처벌은 할 수 없지 않느냐는 얘기도 곧잘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엔 6법 위에 국민정서법이 있는 모양”이라며 ‘법률’과 ‘현실’속에 처한 검찰의 고뇌를 토로하곤 합니다. 한 총장의 취임사는 정치인의 말로도 부적절했을테지만, 하물며 법률가 집단인 검찰 조직의 총수가 할 얘기는 아니었습니다.

불과 6개월 전입니다. 지난 2월 한상대 총장이 서울중앙지검장으로 취임하며 내놓은 취임사는 검찰의 반성문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지금 우리 검찰은 위기에 처해 있다”면서 “사람들이 검찰이 무능해진 것 아니냐, 검찰을 믿을 수 있냐, 검찰이 청렴하냐는 의심을 품고 있다”고 했습니다. 취임사 셋째 줄은 아예 “우리 모두 반성합시다”로 시작해 “이런 현실에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했고, “실천으로 보여주자”고 다짐했습니다. 그는 또 “원칙과 정도를 지키자”면서 “원칙은 법과 규정대로 하는 것이요, 정도는 올바로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법률가로서 형사소송법에 맞게 일을 해야 한다”고 주문했습니다.

지난 6개월 동안 검찰을 향한 불신은 더 했으면 했지, 조금도 나아진 바가 없습니다. 오로지 하나, 달라진게 있다면 반성문을 썼던 한상대 고검장이 난데없이 서슬퍼런 선전포고문을 들고 나타났다는 점입니다. 겸허하게 고개를 숙이며 검찰 위기를 진단했던 서울중앙지검장 취임사와 국민들에게 과거 유신정권과 군사독재정권 시절로 돌아간듯한 악몽과 공포를 선사한 검찰총장 취임사는 같은 사람이 작성했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검찰총장을 목전에 둔 서울중앙지검장 취임 때의 반성문은 가식이었던가요.

다수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고 해서 응징하고 제거하고 처벌하는 것은 세계적으로 반민주적인 인권침해로 손가락질받고 있습니다. ‘황우석 교수’ 사기 사건의 진실을 밝힌 쪽은 검찰도 아니요, 정부도 아니요, 학계도 아닙니다. MBC <PD수첩>이 의혹을 제기했고, 네티즌들이 꼬리를 물고 의문을 보탰기 때문이었습니다. 한 총장 취임사의 죄악은 법률가로서의 일탈 뿐 아니라 민주주의 나라에서 자유롭게 자신의 주의·주장을 펼치려는 사람들을 위축시키고 있다는 점입니다.   

지금 검찰에게 필요한 것은 통절한 자기 반성입니다. 이 정부에 공정과 정의와 진실을 요구하며 정책실패에 비판적인 야당과 시민사회를 ‘종북세력’ ‘좌익세력’으로 매도하며 전쟁 운운할 때가 아닙니다. 일방적인 전쟁은 없습니다. 검찰총장은 개전을 선포했습니다. 곧 검찰을 향한 전쟁이기도 합니다. 한상대 총장은 스스로 검찰과의 전쟁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이 전쟁의 승자는 누가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