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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의 눈

[편집장의 눈] '오세훈을 위한 투표'

오세훈 서울시장이 무상급식 주민투표를 끝내 발의했습니다. 서울을 강타한 폭우로 온 시민이 물난리를 겪고, 복구작업에 민·관·군이 달라붙어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 중입니다. 

오 시장은 수도 서울을 꼬로록 물에 잠기게 한 최종 책임자입니다. 그는 시장 재임 5년 동안 디자인서울·한강르네상스·서해뱃길·세빛 둥둥섬 등 외관만 번지르 광내는 사업에 집중하고, 수해방지 같은 긴요하지만 티 안나는 분야는 등한시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이 와중에 아이들 입에 물릴 숟가락을 빼앗는 문제를 주민들에게 물어보겠다는게 서울시의 당면 최대 현안인지 믿기지 않습니다. 오 시장은 빗발치는 비난여론을 피해 주민투표 발의 현장에 정작 자신은 빠지고 대변인을 보내 발표했습니다. 역시 디자인의 달인입니다.   


서울 대치역 사거리 도로에서 승용차들이 잠겨 있다. 네이버 카페 BMW클럽 아이디 마징가 제공


초·중·고생 급식은 교육청 소관이지 서울시가 아닙니다. 시교육청은 자체 예산이 부족하면 시에 예산지원을 요청합니다.
서울시는 이런 정책이 마음에 안들거나 돈이 없으면 지원을 안해주면 그만입니다. 그러면 교육청은 다른 데서 예산을 조달하거나, 급식 대상을 당초 계획보다 축소해서 시행하겠죠. 서울의 경우 현재 초등 1~4학년 학생들에게 무상급식을 하고 있습니다. 교육청은 이를 5, 6학년까지 확대하기로 하고 시에 695억원의 예산지원을 요청했습니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이 지원을 못하겠다고 거부했습니다. 나아가 무상급식을 시민들에게 직접 물어보자고 나선 것이 무상급식 주민투표가 이뤄지게 된 전말입니다.
투표를 하든 안하든 크게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1~4학년은 교육청 예산으로 현재처럼 무상급식이 그대로 진행됩니다. 만약 주민투표에서 오세훈 안이 이길 경우 5~6학년만 브레이크가 걸리는 것입니다. 오 시장이 지원을 거부한 695억원은 서울시 1년 총예산 20조원의 0.4%도 채 안됩니다. 이번 투표에는 182억원의 비용이 들어갑니다. 다 시민들이 낸 세금입니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무상급식을 반대하는 주민투표 실시관련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주민투표는 특정 정책에 대한 찬반을 묻는게 원칙입니다. 예컨대 하남시장 불신임(주민소환)을 묻는 주민투표는 찬반이었습니다. 헌법 개정을 묻는 국민투표도 찬반입니다.
그러나 이번 주민투표는 단계적 혹은 전면적 무상급식 여부를 묻는 것으로 돼 있습니다. 즉, ‘소득 하위 50%의 학생을 대상으로 2014년까지 단계적으로 무상급식을 실시한다’(단계적), ‘소득 구분없이 모든 학생을 대상으로 초등학교는 2011년까지, 중학교는 2012년까지 전면적인 무상급식을 한다’(전면적)로 정해졌습니다. 이를 정하는 주민투표 심의위원회의 심의위원 11명 중 10명은 모두 서울시가 지명했습니다.  '소득 하위 50% 학생'에게만 무상급식을 하자는 오세훈 안이 채택되면, 반에서 절반의 어린이와 그 부모들은 하위 50%에 속하는 무료급식 대상자라는 낙인이 찍힐 것입니다. 성적으로 우열반을 나누는 것도 모자라 소득으로 상하반까지 나누자는 그 발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계적’이란 표현을 선호합니다. ‘전면적’이란 말은 꺼려하는게 일반의 심리입니다. 여론조사를 할 때 표현 하나만 비틀어도 얼마든지 원하는대로 조사 결과를 얻어낼 수 있다는 건 상식입니다. 무슨 시험도 아니고, 이렇게 길고 복잡한 투표 문안은 처음일 것입니다. 오 시장은 '단계적이냐, 전면적이냐'는 프레임을 짜는데까지는 성공한 듯 보입니다.




무상급식은 보편적 복지 차원에서 피할 수 없는 시대적 요구입니다.
처음에 무상급식에 반대했던 김문수 경기도지사는 도의회와의 협상을 통해 급식 예산을 58억원에서 400억원으로 대폭 증액해 무상급식 대열에 합류했습니다. 내년부터 충북은 초·중학교에 대해, 인천·광주·충남·전북에선 초등학교에 대해 사실상 전면 무상급식이 시작됩니다. 

무상급식 찬성과 반대는 여론을 반영할 수 있는 방법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견해가 다르면 의회와 머리를 맞대고 협의해 조정할 일입니다. 그런데도 오 시장은 단순한 정책적 사안을 대단한 존명(存命)의 문제인양 1000만 서울시민을 투표소로 끌고 들어가고 있습니다.       

오세훈 시장은 그동안 대권 주자로서 별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광화문광장을 만드니, 한강에 배를 띄우니 해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한나라당의 대선 유력 후보인 박근혜는 물론 김문수조차 저만치 달려가는 양상입니다.
오 시장은 다른 대선 주자와 차별성을 띠기 위해 모두가 복지를 외치는 때, 반(反)복지를 선택했습니다. 나름 정치적 승부수를 던진 것입니다. 그가 복지를 포퓰리즘으로 규정하고 급식, 의료, 교육 복지의 확대를 나라를 망치는 지름길이라고 설파하는 것은 반복지의 대표 자리를 확실히 하겠다는 정치적 의도입니다.
설사 다음이 아니라도 차차기 대선에서 ‘반포퓰리즘의 기수’ ‘보수의 아이콘’을 차지하면 손해는 아니라는 계산도 담겨 있을 것입니다.

갈등이 극한까지 가기 전에 절충점을 찾는 게 정치력입니다. 특정 사안에 의견이 다르다고 시의회 출석을 거부하고, 소송을 내고, 주민투표에 부친다면 온 세상에 자신의 정치력 부족을 보여주는 것일 뿐입니다. 24일 주민투표는 오세훈의, 오세훈에 의한, 오세훈을 위한 투표에 불과합니다.
한 정치인의 오기와 독선, 정치적 욕망이 지방행정과 주민자치를 얼마나 농락할 수 있는지 경험할 수 있다면 180억원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해야 할까요.